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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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Sein im Werden

jo_nghyuk 2015. 12. 4. 15:06

올 여름에는 드레스덴에 스치듯 다녀왔다. 열흘 정도 머무르다 왔는데 원래는 어학연수 프로그램으로 4주가 계획되어 있었지만 사정이 생겨서 계획된 체류의 반 정도만 머물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삶에서는 작은 순간들Ausblick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작은 순간들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하는 훈계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지혜를 얻게 되는 때가 있다. 나의 독어 선생인 Olgar는 내가 반복되는 단어들을 이니셜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이를테면 spazieren gehen을 s.g.라 쓴다던지 하는 것들) "Du bist faul! Du musst fleissig sein, wenn du lernst!'(너 너무 게을러! 공부할 때에는 부지런해져야지!) 라고 웃으며 책망한 적이 있다. '나는 어짜피 내가 아는 단어인데 안되나?'라고 반문했지만, Olgar는 'gar nicht'(절대 아니야)라고 응수했다. 

내 주위에는 fleissig(부지런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언어가, 그들의 행동이 나에게 지혜를 향한 지향성을 내어보일 때가 있다. 지혜의 지향성으로의 열쇠는, '훈계의 받아들임'이요, '겸손'이요, '듣는 마음'이다. 지혜는 역동적이다. 매일매일의 개방의 자세를 나에게 새롭게 요청한다. 듣는 마음이 없이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보고자 하는 시선이 없이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제는 눈이 먼 채로 사는 것이 더 두렵다. 관상적인 순간은 침묵의 공간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24시간 동안 지혜를 관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관상의 순간은 지혜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에 있고, 그 깨달음의 길에 참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지혜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들이 그 방향성에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빛에 참여하기도 하고 어둠과 아둔함에 머물러 있기도 할 것이다. 

지혜는 정직한 길로 다닌다. 지헤는 정직을 지향하고, 순결함을 지향하며,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지향하며,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지향한다. 그 길로 다니는 자는 지혜를 '얻게'behalten 되는 것이지, 애초에 지혜로운 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반복적인 지혜로 인해 언젠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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