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시간들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시간들

jo_nghyuk 2017. 2. 18. 18:03
1. (2016.12.2)

느리다는 것은 멈춤에 가까운 시간이다.
빠름은 시간성의 매력이며
조급함은 시간의 지배를 의미하나
느림은 헐거워지는 시간과도 같다. 느림은 시간의 자유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순간이라고 하는 정지를 통해서 영원을 유추하지만
우리는 움직임과 동떨어진 정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정지함이 없는 움직임을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은 영원을 시간으로부터 밀쳐낼 필요가 없다.
누군가 추억을 떠올린다고 해보자.
그는 어떤 장면을 떠올리지 핏기없는 정지된 순간을 떠올리지 않는다.
추억의 장면은 느리고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 이는 멈춤인 동시에 흐름이다.
우리는 이 시간이 향유되었음을 느끼며 그 가운데 평화가 있음을 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의식은 그러한 시간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

2. (2016.12.5)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아내가 일하러 나가면 청소 등을 해놓는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를 내려 조용하게 뉴스를 읽는 일상적인 시간이다. 마지막 남은 코스타리카 원두를 탈탈 털어서 수동 그라인더에 넣고 갈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뜨거운 물을 머그잔과 주전자에 옮겨 담으면서 물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린다. 분쇄된 원두를 드리퍼 위에 담고 뜨거운 물로 살짝 뜸을 들이는데 30초 정도를 또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터프하게 푸어오버pour over방식으로 드립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일본인들처럼 물줄기 두께를 일정하게 하여 고도로 세심한 드립을 한다. 나는 기분에 따라 두 방법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오늘은 마지막 남은 원두라 좀 더 세심하게 물줄기를 조절하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던데, 나는 워낙 느긋한 성격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일정을 조금 재촉하는 편이다. 그런데 사실 급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그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 여러모로 상황판단의 시야를 넓게 한다고 생각하므로 내 템포에 액셀을 밟지는 않으려 한다. 다른 사람이 나의 삶에 액셀과 브레이크를 함부로 밟도록 허용하는 삶은 그야말로 불행한 삶이 아니겠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계에 던져져 있음은 어찌할 수 없지만, 세계의 다른 사람들의 평균성에 맞추지 않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어떤 시간과 시간 사이에 던져져 있고 상황과 맥락에 놓여 있음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큰 물줄기를 보면서도 작은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한 일이다.  

삶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들이 있음에도, 기다리는 대상에만 매여서 살 필요는 없다. 박사 과정을 위해 독일의 지도교수님과 몇달동안 컨택을 하고 있는데, 저번 메일을 보낸 후로 한달이 없게 답장이 없다. 확인 차 메일을 한번 더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교수님은 나 못지 않게 참으로 느긋하다.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는데, 나는 서두르면 나 자신을 그르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의 행위자 자신이 어그러져 있으니, 일도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황만 바라보면 조급해지고 일희일비 하게 되지만, 좀 더 차분하게 느릿느릿 가다보면 가는 길 위에 있는 것 자체로, 나에게 ‘오늘’이라고 하는 생의 현재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3. (2016.12.28)

독일의 교수님과 계속 서신을 주고받고 있다. 편지를 쓰면서 새삼스레 느낀 점 하나는, 우리가 서로의 성을 부르고 또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서로의 가문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듯이. 한 사람은 독일의 동부 지역에서 다른 한 사람은 남쪽의 한국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르고 있다. 인사도 ‘매우 존경하는’에서 ‘친애하는’으로 바뀌었고 이전보다 회신에 대한 기다림의 불안도 덜해졌다. 

한국에서는 모든 일이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존재하는 듯 하다. 그러다가, 2016년 상반기에는 논문을 쓰는 데에, 하반기에는 일을 하고, 편지를 쓰며, 다음 논문을 계획하는 데에 쓰게 되며 무언가 호흡이 길게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들숨도 길고, 날숨도 길며, 숨을 참는 듯한 답답함도 길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느긋함 뿐 아니라 권태로움도 선사한다. 그러나 권태를 보람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신비이다. 나는 이 자유를 사용하여 기다림의 시간을 선용할 수도 있고, 시간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을 수도 있다. 본회퍼의 <저항과 복종>에 수록된 부모님을 향한 편지에는, 며칠 간격으로 ‘지금은 이런이런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런 책을 조달해주십시오’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감옥에 있었는데,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과 인품을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헛되이 사용한 시간은 과거로 무화된다. 그러나 의미성을 획득한 시간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신의 존재를 확보한다. 선용된 시간, 의미를 확보한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롱한 보석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