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화해의 현실성 - 23.01.2018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화해의 현실성 - 23.01.2018

jo_nghyuk 2018. 4. 17. 02:52

오늘은 프랑스 빵집에서 카푸치노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삼았다. 옆의 여성 두 분이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주저하고 있길래 내 의자를 내어주고 나는 더 구석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sehr nett” (참 친절하시군요!)

아직 열기가 뜨겁게 남아있는 커피 잔을 감싸며 생각해본다. 호의적인 것은 일종의 온도가 있으며 냉담한 것도 그러하다. 랭보는 지옥은 확실히 아래에 있다고 했는데, 그 지옥은 분명히 외롭고 스산할 것이다. 함께 함의 온도와 동떨어짐의 온도차는 확연하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전적으로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칠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조용하게 골목 길이나, 정원 속을 거닐기를 원할 것이다. 카푸치노로 따뜻해진 손과 배로 빵집을 나서 겨울의 거리로 들어간다. 푸근해진 마음으로 여러 빛깔과 형태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보는데, 나의 시선이 어제와 달리 사랑으로 가득함을 느꼈다. 사물들의 형상과 색은 더욱 사랑스러웠고, 작은 광장에 들어서 시장이 열려 있는 것을 보면서, 각종 과일들이 즐비한 나무상자들을 보면서, 과일들이 ‘아아 빨강!’ ‘아아 노랑!’ ‘아아 기쁨!’하며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나는 러시아 문학가들의 ‘낯설게 하기’를 생각했다. 그 낯섦은 차갑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밝은 새로이 발견한 단면과도 같다.)

다른 언어와 만나기, 다른 텍스트와 만나기, 다른 사람과 만나기, 다른 도시와 만나고 다른 종교와 만나고 다른 생각과 만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차가운 관계의 적대적인 낯섦에서가 아니라, 따뜻한 환대의 새로움에서, 마치 과일들이 아아 새로움! 아아 상쾌함! 이라고 외치듯이 그러한 관계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우리가 정말로 ‘화해되었음’의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러고 보면 화해라는 것도 ‘화해되었음’, ‘화해하는 중’, ‘화해되어질 것’이라는 시간의 삼중적인 렌즈로 바라보아야 할 듯 싶다. (그럼 ‘되었음’이 아니라, 화해 ‘시작함’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되었음’은 해석학적으로 종결의 의미를 뜻하고자 하지 않고, Vorzeitlichkeit(전시간성)를 의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틴어를 배우면서 조직신학적인 착상을 얻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다. accusativus는 나에게 상대적 시간의 관계성과 방향성을 알려주고, AcI의 문장구성은 나에게 Gleich- , Vor- , Nachzeichtlichkeit의 사유를 향한 길을 열어준다. 다만 부지런하되, 바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data를 부지런히 받아들이되, 그것들을 구성하는 noesis가 자유로워야 싱그러운 것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또, 검소하되 인색하지 않아야 겠다. 그래야 절약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개념과 사유는 관계적이라는 것이 최근의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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