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자유에 대해서 - 21.4.2018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자유에 대해서 - 21.4.2018

jo_nghyuk 2018. 4. 21. 21:55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세계관, 또는 스스로의 준칙 정도라고 생각해두자.

그런데 '이래야만 한다'가 점차 굳어지게 되는 것은 인간의 비극적인 습성인 듯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래야만 함' 때문에 부딪히거나 서로를 회피하게 된다. 그야말로 스스로의 준칙으로서의 세계관이 마치 법칙이 되는 양 행동하고자 하는 스핀이 너무도 자주 걸리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옭아맬 때가 많다. 사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의해서 막다른 길까지 내몰리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없음에도 스스로가 만든 것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화되기 전까지 마치 그러한 것이 있는 양 그 안에서 존재하고 행동하려 했다는 것을. 그것이 먼저는 남을 죽이고 그 다음에는 나를 죽이는 날카롭고 예리하고 차가운 어떤 것임을 끝에 가보기 전까지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이 '아직은' 남들을 죽이고 있으며 나를 죽이는 것이 되지 않을 때까지는. 

그래서 율법이나 윤리라고 하는 것을 신학자들은 늘 자유와 연관지어 생각할 것을 권했다. 자유한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그 요청을 수행하기는 커녕 그 육중한 무게에 짓눌리기만 할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파산한 사람만이 신학적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요청이라 하는 것을 1인칭으로 시작하는 인간은 수행할 수 없고 다만 인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식과 실천의 불화를 겪어본 사람만이 1인칭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1인칭의 감옥은 다름 아닌 '나'라고 하는 경향의 감옥이며, 그러한 내가 만든 이러이러한 행동양식들이 만들어낸 삶의 범주의 감옥이며, 철저한 불가능성의 감옥이다. 내가 그것을 감옥이라 부루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도 세상을 향해, 타자들을 향해 개방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역설은 여기에 있다: 자신의 틀을 포기하고 나서야 참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순서를 뒤집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을 위해서' 사는 경향 혹은 지향의 물결표시에 늘 자신을 집어넣고 말기 때문이다. 참된 나를 발견하고자 틀을 포기하려 하는 그 주체는 여전히 부자유한 주체이기 때문에 포기라고 하는 것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인식과 실천은 불화하고 있다.) 인간은 무엇이 올바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문제와는 여전히 씨름하는 존재이다. 분명한 것은 그 올바른 것을 '늘'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좋은 시기의 파도가 올라오면 그렇지 못한 시기의 너울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소위 정직한 사람들은 이 수행을 부단히 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agent, 즉 행위의 주체가 여전히 나 자신이고자 하는 동안은, 인간은 자기 포기를 결코 진행하지도, 완성하지도 못한다. 행위에 집중할 수록, 다시 1인칭의 자아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식에만 집중하는 이 역시 1인칭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이 친구는 인격을 구분하는 구획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야말로 공간 개념이 의미가 없는 유령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시간 개념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영원에 살고 있는 것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각도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고꾸라져 본 일이 없는 유령이다. 시간적이지도 못하고 공간적이지도 못하며 에너지를 쓰지도 않는 이 친구의 '정신적인' 열정은 공허한 뜨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초월은 이기적인 수행이 아니다. 타자의 사랑을 경험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자기를 포기할 수 있고, 1인칭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을 받는 것도 손을 펴는 것이며, 사랑을 주는 것도 손을 펴야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지향성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최초의 보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신의 방향성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며, 타자들의 지향성이라고 하는 것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나는 그 힘의 장 가운데 놓여진 갈대와도 같음을 인정하는 것. 대결과 적대의 구도가 아니라 협력과 공생의 구도가 애초부터 생명현상의 근본원리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 황금율,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과 네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자유'로서 인정하는 것. 그래서 '~을 위해서'라는 자기 지향성의 방향이 궁극적으로는 섬김의 방향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것. 그 사람의 지향성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물줄기가 이미 수원에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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