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콜랴 크라소트킨 (13)
저녁의 꼴라쥬
Joost Van den Brand는 블로그에 계속해서 네덜란드의 구름만을 찍은 사진을 포스팅했다. 아이디 jonnygreenwood는 이런 리플을 달았다. "이래서야 당췌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지 알수가 없잖소" 하지만 요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구름만을 찍었다. 화사한 구형 캐논 300d로. 조니 그린우드는 그래도 자신이 네덜란드에 있던 시간을 자주 회상할 수 있어 좋았다. 툴툴거리는 리플을 달면서도 구글 크롬의 탭에 그의 블로그를 favorites로 넣어두고 계속 방문하는 한가지 이유였다. 조니 그린우드는 2009년의 네덜란드를 회상했다. 3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거의 없는지라, 네덜란드 전역 어디서나 360도 파노라마의 구름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땅보다, 네덜란드의 풍광은 저 구름 풍성..
그는 만화가였다. 야구를 그리는 만화가. 그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비록 매니아적인 독자들 뿐이긴 했으나) 승부의 결과를 독자들이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십년간 연재한 만화가, 아직도 그의 팀이 결승에 올라가보질 못했던 것이다. 그의 팀은 매우 조용하고 끈기있게 성적을 냈다. 성적은 상향곡선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곤두박질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이십년간 만화를 연재한 것이다. 그의 단행본도 이제는 70권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그가 평생 하나의 만화만 그리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펜과 같은 능숙한 힘조절을 요하는 펜을 쓸 수 없어, 초보자용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두 명을 두어, 자신이 그동..
아침이 오자 나는 준비해둔 햇반과 통조림으로 간략한 조식을 하고 Kenny drew의 Duo를 들으며 산책을 하기로 했다. 거리는, 다시 하얀 순백의 아침을 맞고 있었다. 모든 것을 표백해버리듯이. 나는 야코프 반. 루이스달이 그린 네덜란드의 Harlem 마을의 풍경을 떠올렸다. 강렬한 태양이 표백해버린 풍광의 빛깔들. 백야를 읽고 나서 어느덧 주인공에게 이입이 되었는지 마리의 얼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헤드폰 속으로 베이스의 한 현 한 현이 울릴 때마다 심장에 가까운 혈관 하나 하나가 뛰는 기분이었다. 물감처럼 심장 부근에서 퍼져가는 감정의 얼룩들. 가슴을 표백해버리면 좋을텐데. 가방에서 고장난 니콘을 꺼내 뷰파인더 속으로 Hofn의 아침을 바라보았다. 이 아침을 니콘으로 담고 싶었는데. 니콘..
베이시스트와의 대화 베이스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죠. 그리고 그곳의 문을 여는 소리랄까요. 그러한 것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죠. 대개는, 나무문 비슷한 질감을 지닌 소리들이에요. 밀도가 지극히 차곡한 소리. 저는 그런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 소리에는 허영같은 건 없어요. 저는 음정이 높아지는 것보다, 깊어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때로 연주하다보면 어느새 우물 속에 베이스와 나 단 둘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안겨주죠.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깊이의 바닥에 누워, 스스로의 심장고동 소리를 듣는 기분일까요. 나는 남은 아메리카노를 카운터에 반납하고, (그는 바닥까지 마셔버렸지만) 신시이바시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낡은 게스트하우스에 불을 끄고 누워, 어둠 속에서 아직도 옅..
“이봐, 도착했어. 일어나게” 잠이 들어있었다. 버스 안에는 나와 운전 기사 뿐이었다. 기사는 웃으면서 내가 버스 안에서 내내 잤으니 숙소를 구할 필요가 없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밖은 어두웠다. “여기가 어디지?” “종점이라고. 종점” 기사는 모자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리가 눌려 있는 정도로 보아 꽤 장거리를 온 것 같다. 시계를 보았다. 1시 30분. “너 혹시 행선지를 놓친 거 아냐?” 애초에 놓칠 행선지는 없었다. 나는 론리플래닛을 꺼냈다. 기사는 책을 내 손에서 가져가더니 지도를 찾아 손가락으로 섬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헙” 알아듣지 못한 나는 침침한 눈을 찌푸리고 좌석 위에 달린 실내등이 비치는 쪽으로 책을 가져가 위치를 확인했다. Hofn이었다. “여기는 12번 버스가 끝나는 종..
2008년 1월, 삿포로에서의 이야기이다. 세 명의 동생들과 함께 나카노시마에 있는 삿포로 교회의 교인인 시모츠지 상의 집에 두 주간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처음 시모츠지 상을 소개받을 때 그의 희극적인 표정과 행동에 다소 우리는 당황했다.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이거나, 과장된 듯한 액션이라든가 그의 희귀한 표정을 볼 때마다 우리 팀원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재밌어했다. 처음 그의 집에 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짐을 그의 중형차 뒤에 놓고, 그의 차를 타고 먼저 코인 세탁기 가게에 들러서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야말로 시모츠지 상은 영어 울렁증을 가진 한국인과 별반 다른 게 없는 것이었다. 해서 나와 팀원들 중 ..
“일본 사람입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일본어였다. 짧은 커트를 한 여자는 기타 같아 보이는 가방을 옆에 두고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일본어로 한국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 한국 분이시군요. 일본어를 하십니까?” “예, 회사 업무 차 일본에 가끔 갈 일이 있어서 일본어를 조금 배웠습니다” 여자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일본에도 화산과 눈을 볼 수 있지만, 두 개가 함께 있는 곳은 없어서, 호기심 때문에 아이슬란드를 여행하기로 했다고. “저건 기타입니까?” “네, 레스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타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일렉 기타? 혹시 공연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여행이지만, 왠지 가져오고 싶었다, 고나 할까, 그런 느낌입니다” “그..
비행기 창문 밖으로 케플라빅 공항이 가까워진다. 덜컹, 거리며 엉덩이 밑 바퀴로부터 아이슬란드 위에 내려앉는 질감이 전해진다. 만년설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 cabin을 열고 가방을 꺼내느라 부산한 승객들 사이로 발 밑의 카메라 가방을 더듬거렸다. 어? 끈끈한 질감이 카메라 가방에서 느껴졌다. 카메라를 꺼내어보니 식은 용암처럼 굳은 갈색 용액이 카메라 바디 전신에 들러붙어 있었다. 커피다. 마리. 하루 종일 젖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로맨스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20시간이 다 되도록 카메라 바디에 커피 0.1리터가 들어간 줄도 모르는 방심상태에 놓여있을 정도면, 로맨스를 부정할 순 있..
비행기 바퀴가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활주로에 닿는 순간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인지 유럽 사람들이 섞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비행기 안에서 하나같이 박수를 치며 안전 운행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마리는 나에게 헤어지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마리는 헤드폰을 빼고 비행기 cabin에서 캐리어를 꺼내었다. 나는 인파 속에 부대끼는 것이 싫으므로 사람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마리는 이미 길게 늘어선 줄 저 앞에 있었다. 앉은 채로 손을 흔들자 마리는 손짓과 입모양으로 게이트 앞에 서 있겠다고 했다. 사람들과 마리가 나가는 동안 나는 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스키폴 공항과, 창에 비친 내 얼굴이 겹친 풍경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체가 난기류를 통과하면서였다. 옆자리의 사람이 커피를 쏟은 것은. 여자는 미안하다며 북유럽 특유의 서릿한 액센트의 영어로 사과를 했다. 나는 젖지 않았지만 바닥에 많이 흘린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비티카라고 했다. 얼음 같은 피부에 레몬 빛 블론드 헤어와 초록색 눈동자를 한 27살의 학생이었다. 마리는 일본과 한국에 여행 차 들렀다가 스키폴 공항을 경유해 핀란드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남은 몇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핀란드 사람이 정말 자기 전에 자일리톨을 씹는지에 대해서와, 핀란드와 한국 사람의 비슷한 낯가리는 성향에 대해서, 그리고 핀란드의 피요르드와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경도된 신뢰, 아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