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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이봐, 도착했어. 일어나게” 잠이 들어있었다. 버스 안에는 나와 운전 기사 뿐이었다. 기사는 웃으면서 내가 버스 안에서 내내 잤으니 숙소를 구할 필요가 없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밖은 어두웠다. “여기가 어디지?” “종점이라고. 종점” 기사는 모자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리가 눌려 있는 정도로 보아 꽤 장거리를 온 것 같다. 시계를 보았다. 1시 30분. “너 혹시 행선지를 놓친 거 아냐?” 애초에 놓칠 행선지는 없었다. 나는 론리플래닛을 꺼냈다. 기사는 책을 내 손에서 가져가더니 지도를 찾아 손가락으로 섬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헙” 알아듣지 못한 나는 침침한 눈을 찌푸리고 좌석 위에 달린 실내등이 비치는 쪽으로 책을 가져가 위치를 확인했다. Hofn이었다. “여기는 12번 버스가 끝나는 종..
“일본 사람입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일본어였다. 짧은 커트를 한 여자는 기타 같아 보이는 가방을 옆에 두고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일본어로 한국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 한국 분이시군요. 일본어를 하십니까?” “예, 회사 업무 차 일본에 가끔 갈 일이 있어서 일본어를 조금 배웠습니다” 여자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일본에도 화산과 눈을 볼 수 있지만, 두 개가 함께 있는 곳은 없어서, 호기심 때문에 아이슬란드를 여행하기로 했다고. “저건 기타입니까?” “네, 레스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타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일렉 기타? 혹시 공연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여행이지만, 왠지 가져오고 싶었다, 고나 할까, 그런 느낌입니다” “그..
비행기 창문 밖으로 케플라빅 공항이 가까워진다. 덜컹, 거리며 엉덩이 밑 바퀴로부터 아이슬란드 위에 내려앉는 질감이 전해진다. 만년설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 cabin을 열고 가방을 꺼내느라 부산한 승객들 사이로 발 밑의 카메라 가방을 더듬거렸다. 어? 끈끈한 질감이 카메라 가방에서 느껴졌다. 카메라를 꺼내어보니 식은 용암처럼 굳은 갈색 용액이 카메라 바디 전신에 들러붙어 있었다. 커피다. 마리. 하루 종일 젖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로맨스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20시간이 다 되도록 카메라 바디에 커피 0.1리터가 들어간 줄도 모르는 방심상태에 놓여있을 정도면, 로맨스를 부정할 순 있..
기체가 난기류를 통과하면서였다. 옆자리의 사람이 커피를 쏟은 것은. 여자는 미안하다며 북유럽 특유의 서릿한 액센트의 영어로 사과를 했다. 나는 젖지 않았지만 바닥에 많이 흘린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비티카라고 했다. 얼음 같은 피부에 레몬 빛 블론드 헤어와 초록색 눈동자를 한 27살의 학생이었다. 마리는 일본과 한국에 여행 차 들렀다가 스키폴 공항을 경유해 핀란드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남은 몇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핀란드 사람이 정말 자기 전에 자일리톨을 씹는지에 대해서와, 핀란드와 한국 사람의 비슷한 낯가리는 성향에 대해서, 그리고 핀란드의 피요르드와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경도된 신뢰, 아니 그..
아이슬란드로, 구정 연휴에. 미치지 않고서야. KLM 네덜란드 국적기 안에서 haring(청어)에 감자가 곁들여진 기내식을 받으며 되뇌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광막한 피요르드, 무심하게 떠 있는 유빙, 날선 바람이 부는 빙하 협곡을 하이킹하거나, 발 아래가 펄펄 끓는 휴화산 지대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갈라지고 있는 유라시아 지각 판 사이를 달린다든지, 하는 모습을 뜬금없이 상상해버린 이후부터는 뇌리에서 곧잘 떠나질 않았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도 ‘아주 추운 겨울 시즌에만 오로라를 볼 수 있다’라는 어떤 블로그에서 읽은 코멘트가 자꾸 떠올려졌다. 하지만 분명, 대한민국 국민 아마도 전원이 자국 내에서만 바삐 움직일 이 설 연휴에, 비수기 티켓을 끊고 북극권으로 혼자서 간다는 그 행위 안에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