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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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6월 22일 수기, 제대로 관리하기

jo_nghyuk 2019. 6. 22. 22:51

제대로 한 것만 남는다. 지금까지 만난 나의 멘토 중 제대로 된 것을 전수해준 분들의 것만 나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것밖에 전해줄 것이 없다. 올바르게 한 것만 가르쳐줄 수 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줄 수 없다. 

그것이 어쩌면 바른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일지 모른다. 정신은 이어가는 것이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몸으로, 감각으로 기억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작업은 치열하게 벼려낸 이성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고민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서 진척을 이루어야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층위의 생각을 하다가 다음 국면에는 저런 층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젊을 때에는 한 바늘에 꿰어져야 그것이 옳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정직하고 투명하다면 입체적인 작업이 가능해짐을 깨닫게 되고, 지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온 몸으로 그것이 납득이 된다면 그 나름의 영역적 진리에 그것을 두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그러나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앎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자리에 놓아두는 것이 내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치열한 기도와 땀흘리는 연구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여도, 깊은 곳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무엇이 서로 통하는 것이고 무엇은 배제해야 하는 것인지가 분별이 될 것이다. 그건 기도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가장 먼저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기도의 결을 따라 삶의 궤적을 그려가면서 그 선이 그려가는 것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그 리듬이 말하는 이야기를 다시 내재화하며 삶의 체험과 이해를 통합해가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실수의 교정이고 내일은 오늘의 실패에 대한 포옹이다. 지속durée은 아무 상처가 없는 무결하고 미끈한 어떤 것이 아니다. 지속은 오히려 인내이고 수많은 돌기들과 상처와 파열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 그 이질적인 것들을 리듬으로 수용해내는 시간의식Zeitbewußtsein이다. 지속하는 자만이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듯, 끝에 가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속하지 않는 자는 이야기의 끝도, 흐름도 모르고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단막극이었는가, 아니면 4막극이었는가? 종말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의 조국은 파열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파열을 통합해내는 시간의식의 호흡이 너무도 짧다. 사람들은 오늘 본 뉴스를 빠르게 SNS에 올리고 평가하고, 나름의 단상을 적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상이며, 고민이지 연구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연구를 하려면 숲에 쳐박히든지 현장에 쳐박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긴 case studies를 감내해야 한다. 시간이 쌓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장들은 단단한 현실성 안에 거하고, 흔들림이 없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여기서 나는 본회퍼의 단단한 확신을 떠올린다. 확실한 현실성에서 출발한 이에게는 단순성의 지혜라는 통합능력이 선물로 주어진다. 그가 투박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삶의 여러 결들을 체험하고, 새로운 지각과 인식들을 부단히 통합해내는, 가지들을 모아 둥지를 짓는 새와도 같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그가 부지런한 만큼 그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그가 푹 쉬는 만큼 그는 더 깊어질 것이다. 언제 달리고 언제 멈추는가에의 시간의식은 그러므로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카이로스를 기억하라. 우리의 시간의식은 우리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 지배받는다. 그때 그는 화해의 현실성의 시간중심에 서서 시간구성의 청지기로서 세워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보라,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는 소유할 수 없고 그것을 관리할 뿐이다.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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