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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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Siehe, Honneth!

jo_nghyuk 2019. 6. 29. 20:24

... 의식은 단계적으로 자신을 '개별성과 보편성의 직접적 통일체'로 이해할 줄 알게 되며, 이에 상응하여 자기 자신을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인정'Anerkennung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72)

... 두 텍스트 속에서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은 개인적 의식 형태의 탈중심화라는 의미에서 공동체성의 증대로 나아가는 사회적 과정으로 이해되지만, <인륜성 체계>와 같은 초기의 글에서만 투쟁에는 개별화, 즉 자아 능력의 향상을 위한 매체의 의미가 부여된다. (74)

개인들이 자신을 개별화된 주체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의사소통관계에서 자신을 분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개별 주체의 해방뿐만 아니라, 주체들 사이의 공동체성의 증대는 인정투쟁을 통하여 산출되고 진척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정투쟁은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관적 요구에 단계적으로 주목하게 만듦과 동시에 상호주관적 공통성을 위한 합리적 감정도 발생시켜야 한다. (74)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사월의 책, 1922 (2011).

 

연구소에 들어온 이후로 사회학에 대한 갈급함이 많이 생겨서 스스로의 연구를 진전시킬 때가 아니면 사회학 책을 찾아서 좀 읽게 된다. 그 중간마디는 물론 리쾨르의 책들이었고. 최근에 호네트를 읽으면서 서울에 있을 때에 헤겔이라든지 하버마스를 읽어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좋은 취미는 훌륭한 판단력의 결과물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게임을 할 때 느끼는 쾌락을 관장하는 신경세포를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거나 산책을 하거나 하는 쪽으로 정향시키고 나니 삶이 한결 정돈되는 것을 본다.

근래는 고국에서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데, 나와 리듬이 똑 닮아서 놀랐다. 일어나면 기도와 묵상을 하시고, 바로 일본어 공부에 들어가신다. 프랑스적인 감수성도, 음대생의 리드미컬한 순발력보다 미대생의 차분하고 느릿한 생의 박자감각도 그분과 나는 참 닮았다. 발꿈치에 각질이 일어나는 것도, 피부와 정신과 감각이 예민한 것도, 그래서 여러 신경들이 부딪히는 공간에서 커뮤니케이션 조정을 좀 할 줄 아는 것도.

어쩌면 사회학의 공부는 그래서 자연스러운 시퀀스일지도 몰라. 사람과 사람이, 사회와 사회가, 나라와 나라가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실로 흥미롭고, 전혀 기계적일 수가 없는 살아있는 인격과 인격, 정신과 정신, 의지와 의지, 감정과 감정이 부딪히는, 물결과 물결이 부딪히고 서로 싸대기를 날리고 또 포옹도 하는 창파와도 같은 장Spannungsfeld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차분해지고 싶으면 책을 읽는다. 어머니의 temperature를 물려받은 나는 너무도 자주, 민감해지는 감각들 때문에 힘들 때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의 물결들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자기를 괴롭게 한다고 말했던 distentio와 intentio의 불협화음 속에서, 나는 이따금씩 감각들에 대해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고린도교회의 수만가지의 은사들을 바울이 사랑의 로고스로 반듯하고 정갈하게 정향하듯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찌릿한 감각들을 하나 둘씩 바로 목도해가면서, 고스란히 정돈해가는 정신력 혹은 판단력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로고스나 사랑은 나의 다발성을 정향함으로 통합해준다. 

시간성 속에서 다발적인 것들은 그래서 방향성을 얻어야 통합의 힘에 참여할 수가 있다. 방향성이 없는 통합은 모래를 긁어모으는 것과 같지만 찰기가 없어 금세 부서지는 distentio이다. 

텍스트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어서 글을 썼는데, 또다시 수기가 되어버렸다. 내가 덕후처럼 좋아하는 일본인 교수님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하다가 텍스트를 놀이터에 두고 와버렸다. 그래도 생각해 볼 만한 한가지는, 내 안의 감각들에 대해서도 '상호주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면, 그 색채들에 시간적 여유를 좀 줘보면 좀 더 풍성한 총체성을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의 감각도 타자이고, 내 바깥의 사람들도 타자이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가끔 생각하러 먼 데 나갔다 돌아오는 정신도 타자가 될 때가 있다. 그러니, 나의 타자성에 대해 좀 더 기다려보자는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말하자면 현상학의 그림을 충분히 감상하고 해석학의 활자의 세계로 넘어가보자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늘 너와 함께 새로이 현상한다. 후설은 그에 대해 당연히 Siehe! 라고 말할 것이다. 

악셀만 밟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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