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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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8월 3일의 수기, die Gemeinschaft beherrscht das Einzelwesen

jo_nghyuk 2019. 8. 3. 20:54

서점에 가서 독일어로 번역된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다가 색채를 잃은 다자키가 잃어버린 친구들이 나의 중학생 시절 친구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늘 모여 그림을 그리곤 했다. 토끼는 새로운 반에 올라가 낯설어하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준 녀석이다. '너 그림 잘 그리지? 나 다 알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 뒤에 우리는 미술지망생인 돼지와 소를 만났고 동물농장 구락부 같은 모임을 매일 가졌다. 우리는 센스쟁이 토끼에 이끌려 방과 후에 늘 농구를 해야 했고 소는 느리고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골대 밑에서 나무처럼 늘 팔을 뻗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키가 작았던 나는 바나나를 던지듯 슈팅을 하는 원숭이였다.

나는 한 선으로 그림을 끝까지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스케치의 복층적인 어프로치 같은 것이나 지우개를 통한 부단한 궤도 수정은 머리 속에 없었고 돼지와 소가 성실하게 그린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전학온 하마는 큰 강아지의 털만큼이나 수북하고 짧은 선으로 스케치를 했다. 센스도 있고 생각도 깊은 토끼의 그림은 나와 이들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다. 토끼가 한번은 미술시간에 나무의 몸통을 빨강과 초록 파랑 등을 써서 채색하는 것을 보고 그런 색은 저 나무 줄기에 없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인상주의적인 어떤 감각이었지 않았나. 같은 때 교회에서는 나와 매주 번갈아가며 드래곤 볼을 연재하는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글쎄 녀석이 내가 지난 주에 준 원고에 이어 새로운 적을 등장시키는데 그들의 기를 기존의 초사이언의 노란 빛이 아니라 녹색이 감도는 파란 빛으로 채색해 온 것이 아닌가. 놈은 지금의 조산명 씨보다 20년 앞서 블루 초사이언을 고안한 것이다.

오랜만에 같은 신학부의 독일인 친구가 나를 방문했는데, 독일어를 더 향상시키고 싶어하는 나에게 독일어로 된 소설을 읽거나 다양한 주제의 강의에 들어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면을 해주었다. 용기를 얻어 9년 전 암스테르담에서 읽었던 Kafka on the shore를 Kafka am Strand로 읽어보기로 한다. 다음 학기에는 금요일 저녁마다 Volkshochschule에서 있는 자유 드로잉과 채색 강좌에 들어가보려 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색채도 없고 선의 형상도 단조로운 내가 점차 다채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어쩌면 사람은 각각의 선인데, 서로가 만나면서 면의 색채라고 하는 레조넌스를 내는 것은 아닌가, 그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주는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에 대한 표식들은 아닐까. 개개인의 시간은 단조로운 화살이지만, 상호주관적인 시간은 공간을 열어준다. 요즘은 공간에 대해 자주 사유하게 된다. 

지성적인 작업도 어렵고, 기도도 어렵다. 사회의 사회화도 어렵고, 화해도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서로 보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깨어남을 격려하면서 기다리는 공간의 구성이 더 중요하다. 비어있기만 하면 공간이 아니다. 공간은 비어있는 동시에 구성되는 어떤 것이며, 구성을 돕는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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