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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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8월 5일의 수기, 내가 굴리는 것이 아니다

jo_nghyuk 2019. 8. 6. 05:41

아침 기도회가 끝난 후, 사랑하는 지인과 커피를 하면서 우리의 고갈이 단 하나의 결핍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지지. 아내와 지인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도록 같은 것을 보다가 논문 작업을 했다. 한 문단을 쓰고 나니 사고 능력이 멈춰버려서 다시 지인에게 가서 간단한 일을 돕고,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기도회에 갔다. 

마음이 회복되니 연구에 진척이 있다. 논문 작업이 굴러가지 않던 이유는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동력원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내 동력원은 늘 사랑이었고, 내 주위 사람들도 그러했다. 사랑받는 자는 효율을 내지 못해도 사랑받는 현실에 변함이 없다. 사랑은 거룩한 약속 같아서 사랑하는 자는 효율을 내지만 효율보다는 늘 사랑에 방점이 찍혀 있다. 효율을 내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 순서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한국어를 낯설게 조탁하는 것이나 낯선 독일어를 조립하는 것이나 나에게는 동일하게 어렵다. 평소에 몇 문단이라도 이따금씩 쓰던 습관이 정신적으로 그래서 도움이 꽤 되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무거운 것을 굴리고, 그 무거운 것이 굴러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굴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굴러가게 한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두 개 있으면 하나는 남을 주고, 많은 것이 번잡하게 하면 한 가지를 남기고 다 버리면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주도권의 손을 놓아버릴 때, 휘브리스적인 욕구의 풍선에 과감히 바늘을 집어넣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적이게 되고, 그 공간 안에서 만족함을 얻는다. 내가 사는 현재도 그 지속이 그다지 길지 않다. 나의 집중 시간이 짧다면, 그 집중 시간에 가장 귀한 것을 집어넣고, 나머지 시간은 이웃과 함께 보내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어머니를 모시느라 톰 요크의 쾰른 공연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공연 음원만 라이브 부틀렉 사이트에 올라오는 이것이 나는 작은 기적이며, 은총 사건과도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맑은 정신으로 두 곡 정도를 듣는다.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거리를 보고, 건물들 위로 새들이 자리를 옮기며 나는 것을 본다. 바구니에 채울 것을 염려하는 삶이 아니라 바구니에 든 것을 어떻게 줄 것을 배려하는 삶이 참으로 좋은 삶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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