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8일의 수기, Koexistenz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8월 8일의 수기, Koexistenz

jo_nghyuk 2019. 8. 9. 04:15

기도를 하는데 선천적인 외로움 같은 것을 상기하게 하시는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발열하는 필라멘트처럼 울부짖곤 한다. 

사역자가 된 이후로 외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하신다. 작은 나를 만나기 위해 동독의 작은 마을까지 찾아온다. 친구가 찾아와 트렁크에서 10키로짜리 쌀을 꺼내 주고 돌아간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무겁고 슬픈 것을 주머니로부터 아주 조금, 꺼내 보이려다 친구는 황급히 떠났다. 

아, 차라리 부둥켜 안고 실컷 울기라도 했더라면

창세기 7장에는 의로운 분이 악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설교를 준비하며 그 무서운 심판 이야기보다, 방주에 초대된 '부정한' 생물들에 더 마음이 갔다. 나는 스스로 부정한 생물 같은 느낌을 가지는 때가 희한하게 많은 편이다. 거절이 중첩되면 뻣뻣한 어떤 것이 내 안에 만들어져 내 속에서 타자가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렁이라고 부르시는 데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체성이 있다. 

7장은 사실 삼위일체적으로 읽어야 하는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있고, 그 의로우신 심판 사이에서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다. 방주에 부정한 생물들을 초대하는 노아가 상징하는 것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놀라운 것은 비둘기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비둘기는 새 땅을 지시하는 영이다. 

벽 위의 그래피티를 페인트 공이 지우는 것을 본다. 가만보면 저것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덮는 것 뿐이다. 낙서는 자신을 덮친 페인트 아래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동일성의 원리가 타자를 삼킬 때 타자는 하나된 것이 아니라 눌려 있는 것 뿐이다. 하나됨의 관점을 보다 관계적으로 개방시킬 필요가 있다. 

심판은 타자를 삼켜버리지만 긍휼은 타자를 풀어준다. 

전도사가 되고 나서 참 많이 울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우는 사람이 되었다. 성품 좋은 분이 홍수로 타자를 쓸어버리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부정한 생물을 방주 안에 초대하는 것이 진심임을 알고 나서 더이상 난독증세를 겪지 않게 되었고, 그 이후로 조금씩 오성과 이성이 발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골라서 하는 법을 배우고, 타자가 딛고 있는 지평이 다르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타자의 비동일성을 인정하는 겸허한 빈 공간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분명, 영의 활동이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떠나지 않고 반대로 나를 찾게 되었다. 고백하건데 그건 결코, 나의 성품이 아니었다. 성령은 말하기보다, 먼저 듣는 것을 요구하셨다. 그 영은 언제나 끝까지 이야기를 경청한 후에, 몇 마디 정도만 넌지시 말하곤 했다. 

나의 내러티브는 삶의 공식이 아니다. 타자의 내러티브가 내 삶의 공식이 아닌 것처럼. 우리 모두는 그렇게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정답은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칼 바르트의 설교보다 파울 틸리히의 에세이가 더 울림있게 다가갔던 이유는 바르트가 공감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르트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가끔은 그가 공감능력이 없어 보이기는 해.) 인간은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등만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길이 꼭 나의 길이 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되지도 못한다. 길은 한 방향으로 나 있는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만이, 우리가 사는 이유는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는 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 공간은 사실 효율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3차원은 2차원보다 승하다. 너는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조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줄 필요가 없다. 그저 함께 있어주면 되는 때가 생각보다 대부분이다. 허공에 헛스윙을 열심히 하던 어수룩하던 시절이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스스로 경계인 같다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틸리히를 읽고 싶었는데 서가에서 그 책을 찾을 수 없어 엉뚱하게 그 옆에 놓인 바르트의 설교 원고를 읽고 영이 회복되었다. 나는 바르티안이 아니지만 어쩌면 자꾸 연관이 되어지는 숙명 같은 끈이 있는 것만 같다. 독일에 오기 전에도 벨커의 책을 찾다가 몰트만의 책을 읽고 영의 인도를 경험했었다.

나는 여전히 흐릿모호한 경계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중이다. 

어스름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며, 탈자Ex-istenz(ex:밖으로 - istere:가다, 움직이다)이다. 바르트 말대로 하나님의 Ko-existenz는 유난을 떨 필요도 없고, 게으름을 부릴 필요도 없다. 감사함으로 각자의 리듬에 맞추어 살면 된다. 나에게 있어서 바르게 사는 리듬은 조금은 느린 박자로 걸어가는 것 같다. 

빛도 탈자Ex-istenz이고 어둠도 탈자Ex-istenz인 시간이 저녁이 현상하는 시간이다. 나와 하나님은 Koexistenz이다. 당신과 내가 만날 때 세상은 조금 모호해지고 벨벳처럼 부드러워진다. 완전한 고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빛의 특징은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고 어둠의 특징은 웅크리고 있다는 것이다. 걸어가다 보면, 다른 길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애초에 길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절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처럼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이웃집과 수다를 떠는 철학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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