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대학 시절, 락밴드 콘서트장에 간 일이 있다. 좀 느긋하게 가서 긴 줄의 뒤쪽에 서야 했다. 몇 시간 기다린 후 콘서트장에 입장하면서 드디어 넓은 콘서트홀이 나오자, 일순간 입장하던 긴 줄의 직선이 일그러지고 마침내 무너지면서 백미터 경주처럼 스탠딩 앞자리를 향해 모두들 진격했던 일이 있다. 이번 경복궁 야간개장은 그 콘서트장을 떠오르게 했다. 왕이 다니는 가운데 길을 줄로 해서 길고 넓은 줄이 근정전으로 가는 입구에서 바깥 입구까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 줄은 선 사람 수만큼이나 많았다. 재밌는(?) 것은 줄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다소 수월하게 입장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 줄에 서 있었는데 한시간 여를 기다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사실 예매권을 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진리의 영은 자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유 가운데서 신비롭게도, "자발적으로" 우리는 희생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누구도 십자가를 강압적으로 메고 갈 수 없다. 반대로 어느 그리스도인도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 가장 불쌍한 것은 이 가운데 끼어 탄식하는 이들이다. 누구도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못한다. 사람이야말로 이 자발성을 질식시키는 데에 선수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에게는 한병철의 표현대로 '머뭇거림'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머뭇거림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위대한 기다림의 시간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시간이다. 너는 참으로 결정하기 위해서 머뭇거린다. 네 안에서 진실된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지도 모른다. 그..
예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번아웃된 베드로에게 회복시키신 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아마도 충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을 먼저 회복시키신다. 베드로의 연약과 상관없이 (더 강함이 더 사랑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예수님은 일깨우셨다. 그 사랑은 베드로의 안에 있었다. 충성의 실패와 함께 그 사랑은 어두컴컴한 동굴 가운데로 숨어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과 자격을 동일한 위치에 놓으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자격없는 자를 그 위치에서부터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포옹해오신다. 그리고 그에게 애초에 힘이 없었음을 주지시킨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없음으로, 능력이 없음으로, 의지가 약함으로 우리가 그..
아이를 막 대하면 그는 거칠어진다. 그리고 모든 감각이 러프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조심스럽게 대하면 그의 모든 감각은 섬세해진다. 하나님은 자녀를 막 대하지 않는다. 쓸 것과 채울 것을 막 던져주는 분이 아니다. 그는 절대 그의 자녀를 방기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단호함 가운데로 그의 자녀를 부드럽게 이끌어가신다. 가장 나쁜 자녀교육은 그를 애매모호한 미래 가운데로 단호하게 이끄는 것이다. 목표는 분명하고 인도는 부드럽고 가르침은 단호해야 한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과 언어 발화에서 구강의 후음을 미묘하게 분별해간다는 것, 문체에 있어서 온갖 부드러운 시적이고 단단한 산문적인 것을 소화해간다는 것, 수많은 도구 사용법을 익혀간다는 것, 방종의 먼지를 털고 단정한 자유로 나아간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개방성에 대한 요청과 도전을 받는다. 단지 외부와 내부의 이분법적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육체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할때도 이제는 단순히 육체를 논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라는 말은 순진한 이분법이다. 영혼 또한 악할 수 있다. 마음의 육체성이라는 표현을 기억해볼 때, 우리는 육체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낡아져가는 어떤 것, 유한한 피조물성, 자기반복을 추구하는 내적 폐쇄성이 육체성이라고 정의내려보자. (이것도 불충분하겠지만) 오히려 육체성과 반대되는 것이 육체의 내부에서 생겨난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위로부터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면서도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