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우리는 시끄러움을 찾는다 고요함 중에 다시 찾아올 갈망으로부터의 피난길에 올라 인파 속으로 숨어 군상이 되고자 하는 것도 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덜컹거리는 감각도, 소음도, 옆사람의 얼굴도 지워버리고 공복감만을 느끼는 것이지 그들은 몰두하길 원해, 피로감을 피해, 너도 방심하지 말고, 어서, 스마트폰 속으로 내부의 장기에 청진기를 대는 대신 외부의 장기에 이어폰을 꽂고 제프 버클리를 마주할 엄두가 안나는 것은 이 가수는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진실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지 자, 이리와 어서, 바보같은 소리는, 치우고 신나는 노래나 같이 듣자고 진통제와, 할렐루야,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이 보이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시켰다. 비둘기는 가만 보면 참 예쁘다. 목덜미에는 반짝이는 청록빛과 자주빛이 어우러지는 네클레스를 걸고 있는 것 같고 잿빛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처럼 뒷짐을 지고 도로변을 산보한다.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아이를 꾸짖는 엄마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어온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급하게 점원의 인사를 등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포천 갑니까?' '이 버스는 안 갑니다. 다음 버스 기다리세요' 나는 다시 커피숍에 들어와 1분 전에 앉았던 자리에 와 앉았다.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멋적은 기분이 든다. 손에 든 커피가 입장권이라고 되는 양 테이블 위에 눈에 띄게 놓아둔다. 마침내 버스가 오고 철원으로 가는 군인 몇과 함께 차에 오..
길을 걷다 풋, 웃음이 나온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즐겨 하신다. 그분 자신이 숨는 것도 즐겨 하시고,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찾아 내는 것도 즐겨 하신다. 그는 우리의 삶에 참으로 많은, 다양한 선물들을 주셨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과 염려, 방어기제가 그러한 것들을 '받지 않는 안정권'으로 우리를 숨긴다. 나는 그러한 순간들마다 내 영혼에 어스름이 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받지 않고' '주지도 않는' 안정권에 나를 밀어넣을 수록, 내 지각은 매우 협소해진다. 때로는 중간에 낄 때도 있는데, 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라는 우스꽝스러운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는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나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대립각이 전부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대립각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사람의 이것은 저사람에게는 타협의 여지없는 치명적인 이론이다. 저사람의 저것은 이사람에게는 너무나 꽉 막힌 갑갑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전부 경험해보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를 소용돌이치며 나선형으로 오가면서, 나는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은 심정이다.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나 위험은 너를 잃어버리는 파멸로 이끈다. 안정을 추구하라, 그러나 안정은 너를 질식시키고 타자를 배제한다. 위험을 감수하다 나는 어느새, 안정으로 빗장을 걸고 지켜야 할 때를 알게 된다. 안정을 추구하다 나는 어느새, 빗장을 풀고 회오리처럼 풀려 나가야 할 때를 알게 된다. 나는 울고 싶다. ..
십자가는 선택하는 것이다. 넓은 길 가운데서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는 기점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성별된 고통이다. 그러나 사실 십자가의 길은 초대에 가깝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탁자에 놓여있는 부담의 초대장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불편한 순례를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따르는 것이다. 불편한 제자의 길을 따르는 것. 그러나 온전히 항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예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길에 있어 제약이 될 것이고 약함이 될 것이다. 약함과 장애,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 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