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9/06 (17)
저녁의 꼴라쥬
... 의식은 단계적으로 자신을 '개별성과 보편성의 직접적 통일체'로 이해할 줄 알게 되며, 이에 상응하여 자기 자신을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인정'Anerkennung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72) ... 두 텍스트 속에서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은 개인적 의식 형태의 탈중심화라는 의미에서 공동..
equilibrium은 본래 라틴어로서, 평형을 뜻하는 단어이다. equal이라는 말은 동등한, 같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초월성을 뜻하는 접두어인 tran(s)를 붙이면 tranquility, 즉 평정, 고요함, 냉정 등을 의미하는 합성어가 된다. 그러니까 equilibrium은 실재하는 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어떤 일치점을 지향하고 있다면, tranquility는 그것들의 조화와 균형이 어그러진 상태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또는 냉정하게 일관된 상태로 진행해가는 의미를 겨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trans를 초-로 본다면 당연히 위로부터 오는 초월성의 힘으로 느껴질 것이고 어떤 것이 전이하는transitional 상태, 즉 전이적- 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해 횡단적..
며칠 쉬었더니 편도선이 가라앉는다. 기쁜 일이다. 아픔은 몸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다. 멈춰. 약을 먹고, 몸을 놓아두는 수 밖에 없다. 봉기를 진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연스러움만큼 좋은 것은 없다. 흘러가는 대로, 지나가는 대로, 놓치는 대로... 글을 쓰면서 말줄임표를 자주 쓰는 성격은 아니다. 아는 목사님은 늘 말줄임표를 글에 넣으신다. 그분에게 느릿느릿, '생활'이라는 것을 배웠다. 말을 고르면 고를수록 말이 고르게 고와진다. 그날 저녁에 또는 다음날 저녁에 자꾸 고치는 글은 정갈한 음식같이 한결 개운해진다. 말을 고르다보면 말을 꼭 줄이게 된다. 말 속에 불필요한 말들이 참 많다. 오랫만에 예전 살던 마을을 방문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정원을 바지런히 가꾸고 있다. 저 정원은 할머니의 세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적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것cognitio naturalis을 믿음의 신조들articuli fidei과 날카롭게 구분했고, 후자를 다루기 위해 서론praeambula을 할애했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는 그의 에서 삼위일체론을 포함한 신론을 일반적인 논의 과정 속에서 다루면서 그것을 세계의 제1원인인 신 개념으로부터 유도하고 발전시켰다.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의 두 가지 인식론적 질서는 아직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다. 후기 토마스주의 즉 바로크 스콜라 철학과 신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야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의 "이층-도식"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가톨릭신학에 의해서도 비판받고 있다. 이 도식이 바로크 스콜라 철학과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계시신학의 상대 개념으로 재등장했을 때,..
1 Just as people can be efficient without being loving, we all know people who are loving but not very efficient. Think for a moment about the most loving people you have known. By our modern criteria of success, how efficient were they? The people who have taught me the most about love have had more than their share of what we call dysfunction: self-doubt, suffering, and failure. I think of Bro..
제대로 한 것만 남는다. 지금까지 만난 나의 멘토 중 제대로 된 것을 전수해준 분들의 것만 나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것밖에 전해줄 것이 없다. 올바르게 한 것만 가르쳐줄 수 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줄 수 없다. 그것이 어쩌면 바른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일지 모른다. 정신은 이어가는 것이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몸으로, 감각으로 기억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작업은 치열하게 벼려낸 이성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고민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서 진척을 이루어야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층위의 생각을 하다가 다음 국면에는 저런 층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젊을 때에는 한 바늘에 꿰어져야 그것이 옳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정직하고 투명하다면..
모범생이 실족하면 금식 외에는 답이 없다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창공을 활강하던 알바트로스가 추락하면 그 큰 날개는 걷기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렇게 뒤뚱뒤뚱 거리며 땅 위를 걷는 것은 알바트로스에게는 비참이다. 왜냐하면 그의 지어짐은 땅 위를 걷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 위를 훨훨 나는 것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땅 위를 걷고자 하면 오히려 육중한 날개는 장애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기도를 하는 자는 기도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냐. 그 요청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러하다. 다른 여러가지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내 길이 아니면 나에게는 길이 아니다. 사람들은 갑판 위를 뒤뚱거리며 걷는 알바트로스를 비웃는다고 보들레르는 노래했다. 내 길이 아닌 길을 걸으려 하면 열매도 없고 비웃..
어깨가 많이 뭉치고 편도선이 부었다. 의지적으로 도서관에 안가고 집에 돌아왔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목이 간당간당하다 느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쇼트가 온 메인보드처럼 뭔가가 끊어진 것만 같다. 태생적으로 느린 리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꼭 리듬이 조급하게 엉켜서 몸이 고생한다. 효율보다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되뇌이면 뭘하나. 다음 주부터 또 한 달간 연구를 멈춰야 하는 일이 생겨서 현재 진행하는 것의 매듭을 짓고자 기어를 올렸었는데 차가 퍼져버린 느낌이다. 내 몸을 다루는 방식은 먼저는 가족을, 다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내 몸은 타자로서의 나이다. 내 몸은 나와 협력하는 공간적 체계이다. 내가 조심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나의 고집스러운 장..
프랑스어 수업에 다녀왔다. 5주나 빠졌는데 다행히 여전히 쉬웠다. 지난 주에 논문에 집중하려고 빠지게 되면서 아예 못 갈 각오를 했었는데, 그럼에도 가게 된 경위는 이렇다: 도서관 카페테리아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데 프랑스 가족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커피를 가져오려고 내 가방을 좀 지켜달라고 했고, 다녀와서 merci, 라고 했을 뿐인데, '이 사람 프랑스어를 하네?'라고 서로 말하길래 '네, 아주 조금'이라고 말하면서 대화에 시동이 걸려버렸다. 그들은 리스트 음대에 다니는 아들을 방문하기 위해 Aix-en-Provence(아니 심지어 프로방스)로부터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너 세잔을 아니?' 응, 아주 좋아하지. 대화를 하는데 프랑스어를 향한 신의 윙크 같은 것..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그러나 결코 그 엄정함은 사슬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무거운 긴장을 가지고 그는 몇 보 나가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의도 죄도 아니요, 들려오는 말씀이다. 리쾨르가 말하였듯, 우리는 광야 한 가운데에서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방위의 개념이 무색할 때에는 새벽별을 찾아야 한다. 나의 길은 내부의 기억도, 기대도, 직관도 아니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며,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호가 아니라, 저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