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9/07 (6)
저녁의 꼴라쥬
비로소 논문의 본론을 개시했다. 역사적이다. 게슴츠레 책을 읽으며 귀퉁이를 빼곡히 채우는 것은 쉬웠다. 본론의 첫 문장을 쓰는 것이 거인을 굴려야 하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고 그것을 피해 책 겨드랑이 속에서 너무 우래 웅크리고 있었던 듯 하다. 불안하면 자꾸 소품들은 늘려가지만 큰 가구의 조립은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 단상들은 빼곡한데 그것들을 굴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근래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사이 스스로의 리듬이 망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내부가 단단치 않고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서 사는 모양새였다. 나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한 미니멀리스트 경영자의 책이었다. 그의 일화에 나온 한 노승은 가득 채워진 잔에 계속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비우지 못한 잔에 어떤 것도 채울 수..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보편 은총이라고 부른다.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과거화된) 어떤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창조주의 창조를 그래서 완료 시제Perfektform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시점이 창조라면 하나님은 오늘이나 내일은 현재하실 수 없는 분이 된다. 하나님의 현재는 하나님의 임재Gegenwart이다. 이 임재는 모든 시공의 근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원적인 무엇'의 추상이 아니다. 추상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 옆에 놓이는 무엇일 뿐이다. 반대로 그 근원이 모든 현존재를 규정한다. 내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는 것, 그것을 하..
연구소의 프로젝트 중에 Heart of flesh, not a stone이라고 하는 주제가 있다. 오랜 시간 나는 갈등 해결을 머리로 풀려고 했었던 것 같다. 목사이기도 한 나의 지도교수는 나에게 칼 바르트의 화해론은 설교와도 같아서 갈등 해결을 위한 구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상호간의 소통은 서로가 위치한 어쩔 수 없음의 실존성에 대한 인정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함께 열려짐의 어떠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고는 도무지 늘 불가능성에 머무르게 된다는 거다. 갈등 속의 두 사람 혹은 집단이 서로를 솔직하게 내어보인다고 할 때, 둘 다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갈등..
여행이 끝났다. 에너지도 시간도 돈도 다 소진되었다. 벽에 꽂은 아이폰처럼 하루종일 침대에 결속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두 교회에서 찬양을 하면서 내 안에 줄곧 목말랐던 어떤 것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라던가 하는 것을 잘 못보는 편인데 바이마르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또는 찬양을 하면서 아름다운 환상을 이따금씩 본다. 아름다운 곡선을 긋는 돔 지붕과 웅장한 제단과 미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한 성전 안에 나는 종종 들어가 있다. 환상은 참으로 현상학적이어서 내가 속한 공간의 방위는 언제나 나로부터 겨누어진다.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현존재들로부터 참된 공간이 개시되는 것이다. 단촐한 기도처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성전이 되는 meta-morphosis는 티끌과 같은 인간에게 입혀..
드디어 파리에 왔다. 짧은 이탈리아어를 말하면서 생각보다 프랑스어와 섞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의 뇌란 참 신기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말하려 보니 모든 것이 희미해져 있었다. 마르모탕 미술관 티켓을 세 장 주문하려는데 trois personnes가 아니라 tre personnes라고 말해버렸다. trés personnes? 참으로 인간적인? 세느강 옆의 아파트를 숙소로 잡았는데 동네가 너무 차분하고 좋아서 아침에 미술관까지 산보하듯이 걸어갔다. 도착한 첫날 밤에 편의점인monoprix에 가서 비싼 가격에 화들짝 놀라서 물 몇 병만 사들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근처에 Lidl이 있는 것을 보고 삼겹살과 새우를 사와서 구워 먹고 커피까지 내렸다. (역시 독일!) 주방이 있으니 아침 저녁을 장을 보고 점심을..
나폴리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에서 라디오헤드 라이브 부틀렉을 오랫만에 꺼내 듣는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차분한 곡들 위주로 듣는 스스로를 본다. 지나치게 울적하거나, 지나치게 광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메트로놈이 좌로나 우로나 요동치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점점 부드럽게 곡선을 그어주는 리듬이 좋아진다. 나와 라디오헤드의 인연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우울감에 허우적대는 룸펜이었고 레코드샵에서 처음 산 라디오헤드 카세트테이프가 ok computer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exit music이나 no surprises 같은 곡들이 좋았다. 슬퍼함을 끝까지 몰아갈 수 있는 맹목적인 그 어떠함에 천착하던 세대였고 다음으로 나는 스탠리 던우드가 디자인한 붉은 커버의 amnesiac 테이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