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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은 참 외롭고 슬프다.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데 '먼저 네가 가면을 벗어야지' 하고 말하신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재차 물어보신다. '정말 그러기를 원하니?'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물음의 중첩은 나를 베드로처럼 주춤하게 만든다. 그 뒤에는 통상적 이해를 넘어서는 무거운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꾸미고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면을 벗는 것은 페르소나를 벗는 것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동일성의 자아가 철저히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 더 이상 어떤 위상도 점유할 수 없으며 무력하게 무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가면은 빛을 반사하는 얼굴 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본연의..
아침 기도회 후에 아내를 위해서 가을 꽃을 샀다. 집에 돌아와서 줄곧 설교를 작성했는데 계속 고쳐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그러지 못했다. 찬양 인도를 위한 콘티를 준비하는데 빛에 대해서 찬양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기타를 치면서 한 곡씩 준비하는데 유독 힘이 달렸다. 특별히 힘이 달리는 곡이 있어서 빼두었다. 힘이나 능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콘티를 구성하고 나니 힘이 달리던 곡을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위치시키게 되었다. 기도회 준비를 하고 나니 한 시간 정도 짬이 났다. 자꾸 무언가를 주를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경직된 자세를 내려놓고, 에스프레소를 리스트레토 정도로 내려서 작은 발코니로 난 문지방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었다. 사람은..
나는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말테 브리게처럼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아니다. 내 시선이 힘적인 것이 아닌 부드러운 어떤 것에 의해 풀려짐을 경험한 이후로부터, 시선의 변경이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야가 열리는 체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은 불안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용에서부터 개시된다. 스스로의 그러함이나 이러저러함에 대해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스탠스 자체가 존재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치달리는 처연함이 강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함에 대한 사유가 힘과 의지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시간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며 앞을 지향하지만 속절없이 다시 흩어짐을 경험하는 하이데거적 시간의 극복은 힘적인 용기와는 전혀 다른 편에서 기획되어야..
나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게 금식 중의 나의 고백이다. 사실 금식에의 단행은 사소한 개연성의 틈으로 들어온 우발적 사건에 가까웠다. 지인이 하기로 했(다고 오해했)던 릴레이 금식이 구멍이 나 버려서 그 커다란 공허를 자기가 (뭔데)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영적 씨름하는 것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할 때가 종종 있다. 예배를 인도하기 전이나 공동의 예배에 진입해야 할 때는 몸살을 앓듯이 무거운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부단히 씨름하는 것은 그래서 그저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각 조각 부숴져 시간을 하염없이 땅에 게워내며 연명할 때도 많다. 쉼 같은 것도 사실 잘 모르고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달려야 하는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