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Fake plastic trees 본문

콜랴 크라소트킨

Fake plastic trees

jo_nghyuk 2009. 12. 18. 01:22

 

7시 40분,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졸린 눈으로 나는 머리부터 감는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얼굴에 물을 묻히는 것은 아직도 부담스럽다. 아직은 의식과 외부세계가 접점을 찾지 못한 시간이라, 샴푸를 하는 동안 나는 의식이 깨어날 만한 유예기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세수를 하면 곧바로  7시 50분, 집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간다.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다. 밤새 야간근무를 하신 점장님이 빨간 눈으로 나를 맞는다.

어, 잘잤어 민혁씨?

네, 피곤하시죠.

나는 밤새 빠진 과자와 음료수, 컵라면 등을 얼핏 확인하고 바로 창고로 들어간다. 창고 안은 어둡고 수많은 식품들로 가득 차 비좁다. 창고에 있는 컵라면 박스를 뜯어 몇 개의 라면들을 벽돌처럼 안고 진열대로 나와 나는 차곡차곡 컵라면들을 쌓는다. 밤새 허술해진 부분을 다시 단단하게 하여 무장하듯 라면과 과자 등을 다 채워 넣으면 이번에는 냉장고로 들어간다. 냉장고는 창고 옆에 설치되어 있으며 창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냉장고의 옆문이 있는 구조였다. 포카리 스웨트, 2프로, 식혜등이 많이 빠져있다. 나는 빠진 음료수의 대열을 앞으로 밀어내고 그 빈 공간만큼 다시 음료수들을 채워넣는다. 빈 것들을 채워넣는 행위는 내 일상이 되었다.
한번은 내가 냉장고 안에서 음료수를 정리하고 있을 때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서 음료수를 몇 개 꺼낸 적이 있었다. 나는 새롭게 생겨버린 음료수 대열의 공백을 참기 힘들어서 바로 음료수 열을 앞으로 밀었는데, 손님이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음료수 정리를 기껏 다 해놓았는데, 예측치 못하게 손님이 그것을 몇 개 앞에서 빼내어 버리면, 손님이 가게를 나갈 때까지 가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왔다가 그 추운 냉장고에 다시 들어가기도 귀찮고 버거운 노릇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밤새 고단하게 편의점의 형광등과 함께 눈을 켜고 있던 점장님을 최대한 빨리 침대로 보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정리 작업을 빨리 마쳐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인수인계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1년 5개월, 도중에 야간 파트도 해보았지만 침대는 아침에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야간 일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오전 파트타임을 맡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편의점은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있어서, 손님들은 주로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직장인이나 아침끼니를 거른 학생들이 많다. 혹은 밤새 약주를 하신 어르신들이 드링크를 사가는 것이 아침 일과의 전부인 것이다. 하나 더 보태자면 잔돈을 바꾸기 위해서 껌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출근 시간대가 지나버린 10시부터는 매우 한가해져서, 나는 해가 적당히 들어오는 카운터에서 멜라토닌을 분비시키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조그jog 다이얼 형태의 볼륨을 130도 정도 돌려놓고 텅 빈 편의점에 홀로 앉아 라디오헤드 등을 듣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그야말로 자기만의 음악감상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8시, 한 여고생이 편의점에 들어온다. 너구리처럼 쳐진 눈매에 권태롭게 팔을 늘어뜨리고 등에는 기타 백을 매고서 우유 칸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기타 가방의 자크에는 귀여운 곰 인형이 달려 있다. 교복에 기타 가방. 아마 밴드부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시 터덜터덜 걸어온다. 아무말 없이 쳐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단발의 헤어, 영화 비밀에서 히로스에 료코가 짓는 듯한 의뭉스럽고 나른한 표정,

--삑

600원입니다.

여자애는 기타 백에 걸어놓은 곰 인형의 등에 있는 자크를 열고 동전을 꺼낸다. 100원짜리 동전 두 개, 50원짜리 동전 7개, 10원짜리 5개.

...

600원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

왜 나가질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거지? 생각하다가 아, 하고 나는 노란색 플라스틱 스트로우를 건네준다. 여자애는 그제서야 빨대를 꽂고 편의점 문을 열고 나선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여자애는 8시에 딸기우유를 사고 동전들을 카운터 앞에 쏟아뜨리고 갔다. 그 행동에는 어쩐지 음악하는 사람의 막연한 우울함 같은 것이 배어있었고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당신도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는군요, 그렇죠.

A green plastic watering can

Fake chinese rubber plant in the fake plastic earth

Then she bought from a rubber man

in a town full of rubber plans to get rid of itself

and it wears her out

it wears her out

it wears her out

it wears her out

그녀가 들어오면 나는 무심결에 자꾸 Fake plastic trees를 틀게 된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그냥 그녀와 동일한 질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그녀와 나, 그리고 이 공간을 특정 주파수로 채워넣고 싶었던 것이다.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에요’ 라고, 어떤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음악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진 어떤 연관성의 트랙을 미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음악에는 관심이 없는지 자신의 귀에 꼽아놓은 아이팟 이어폰을 뽑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나는 반발심으로 컴포넌트의 조그다이얼을 90도에 가깝게 볼륨을 높인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귀에 박힌 이어폰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나에게 한마디의 문장도 건네지 않았다. 그냥 나를 의뭉스럽게 쳐진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삑

600원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서 6개월 동안 그녀는 편의점에도, 정류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보통은 딸기우유를 사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떠나는 패턴인데, 장장 6개월 동안 나타나지 않는 걸 보아 전학을 갔던지, 이민을 갔겠거늘 하고 나는 단정지어 버렸다.

그렇게 하루의 그녀가 빠지고, 이틀치만큼의 그녀가 빠지고, 사흘치만큼이 빠지고, 빠지면서

나는 무엇인가로 그 구멍을 채워 넣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치울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때에 컴포넌트의 조그다이얼은 이제 140도까지 돌아가 있었고 나는 강박적으로 물품들을 더 철저하게 채워넣기 시작했다. 한 손님이 들렀다 나가면, 초코바를 사가든지, 과자를 사가든지 껌 한통을 사가든지 할 것 없이, 창고에서 그것을 가져와 그 빈 곳을 단단하게 자꾸 채워 넣어야만 했다. 그래서 볼륨을 140도까지 올려놓은 상태로 창고에 들어갔다가, 손님이 들어와서 귀를 막고 불만스럽게 소리를 줄이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그러나 나는 볼륨을 줄이지 않았다.

볼륨을 줄이면 잡음이 드러날 것이다.

점차 창고에 들어갔다가 볼륨 140도의 상태로 손님을 맞는 일이 잦아졌다. 나도 손님도 불만스러웠고 - 물론 잘못은 나에게 있었지만 - 나는 야간타임으로 파트를 바꾸게 되었다.

12시부터 8시까지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지만 볼륨을 높이는 일은 이제 그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야간 근무 첫 날의 해가 밝았을 때, 근무교대 시간이 채 못 되었을 때, 나는 편의점에 들어오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당황스럽기도, 반갑기도 했지만 나는 잠자코 가만 있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기타 백도, 곰 인형도, 딸기 우유의 취향도 없었다. 그녀는 스포츠음료를 들고와 나에게 물었다.

얼마에요?

..예? 예, -- 삑

1300원입니다.

여기요.

잔돈을 거슬러주는 것도 잊은 채 나는 그녀에게 문득 물었다. 지금 보면 어떤 생각으로 말을 걸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저기... 기타는 이제 안 치시나 봐요?”

“네?”

“전에 기타 가방 메고 자주 오셨던 것 같은데”

그녀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기타 안 치는데요, 잔돈 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7시 40분, 그렇다면 그녀는 줄곧 내가 나오기 전에 등교를 했던 걸까, 지난 6개월 동안. 그렇다면 내가 6개월 전 만난 그녀는 며칠간 지각을 했던 때였던 걸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상쾌한 표정으로 근무교대를 하러 들어오는 점장님과 인수인계를 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근무 패턴이 바뀌어서일 것이다. 덕분에 혼란스러운 생각을 한나절 내내 나는 침대 위에서 곱씹게 되었다.

저, 기타 안 치는데요,

그럼 내가 그때 보았던 그 기타 백은 어떻게 된 걸까. 그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아니 분명 그녀가 맞는데, 하지만 의구심을 계속 가질수록 6개월 전 그녀의 얼굴에 나는 확신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 내일 한번 더 물어보자, 한번 더.

-- 삑

“저기요,”

“네?”

“6개월 전쯤에 기타 가방 메고 계신 걸 본 기억이 있어서요. 혹시 그때 기타 메고 다니시지 않으셨나요?”

“...”

내가 생각해도 이것은 어색하고 이상한 질문이다. 동네 편의점 직원이 기타 운운하며 말을 건다면 나라도 생뚱맞은 기분이 들 것이다.

“아, 제가 다른 분하고 착각을 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

“그거...! 아하하, 테니스 가방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네?“

“제가 저번 학기에 테니스를 CA로 했었거든요. 그래서 테니스 라켓 가방을 메고 다녔었어요”

“아, 예...”

“얼마죠?”

“예... 1300원입니다.”

편의점을 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본다. 7시 40분, 허탈함이 밀려왔다.

테니스 가방이라니, 가방 속에서 통기타를 꺼내며 Fake plastic trees를 부르는 그녀를 그리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그녀는 7시 40분에 버스를 타러 나오는데 한동안 지각을 해서 8시에 얼굴을 비췄던 것 뿐이고 지금은 다시 그 생활패턴이 복구가 되어서 7시 40분에 버스정류장에 나온다. 그리고 그 가방은 기타가 아니라 테니스 라켓을 넣는 가방이었다.

그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테니스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인 것이다. 이쯤되면 동질감의 트랙에서는 한참 멀어지게 되고 생을 미행할 음악도 뭐도 더 이상 조그다이얼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순간에 음악소녀가 체육소녀가 되다니. 아, 허탈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딸기 우유가 아닌 스포츠 음료를 사는 것일까.

그런데 왜 그녀는 전처럼 가격을 조용히 눈으로 물어보지 않은 것일까.

혹시 7시 40분의 스포츠 소녀와 8시의 밴드부 소녀는 동일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She looks like the real thing

She tastes like the real thing

My fake plastic love

But I can't help the feeling

I could blow through the ceiling

If I just turn and run

And it wears me out, it wears me out

It wears me out, it wears 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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