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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한동안 시고 소설이고 다 쓰기 싫을 때가 있었다. 아니면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것이, 우리는 자신감이란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응집시키고 응고시켜서 이루어내야 하는 어떤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한다. 주변에는 천재성이라고 할 만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보다 자신감이 매우 부족한 것은 아닌가, 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신에게서 오는 것인가, 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타자에게서 부여받는 것인가.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타자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노래했다. 나는 신과 자아와 타자의 역할을 분리하고 싶지 않다. 이 삼각형은 어떤 고리의 순환을 이루냐면, 내가 타자를 도울때 타자는 힘을 부여받고, 역으로 ..
참된 충성에는 경직이 없다. 이 충성의 근원은 자유이다. 성령은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 이 자유에서 충성할 수 있는 자유로 신자는 나아간다.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외부에서 강요하는 충성은 억압이고 폭력이다. 그러나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충성은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연약한 죄인이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내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를 임재를 통해 움직여가신다. 이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요가 아니라 요청이며 먼 곳으로부터의 손짓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맞잡은 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씩 우리가 속해있던 미궁을 빠져나온다.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는 중이다.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맑은 소금이 될수록, 그 결정이 순수해지고 순결해질수록, 상한 것들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따금씩 한적한 곳으로 가시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던 순간의 그의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지쳐 있는 것이다. 모든 상해가는 것들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그로부터 소금을 얻어가듯이, 그는 상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주고 자기는 상해간다. 그는 멸하지 않는 빛을 타자에게 주고 자기는 침침해간다. "오직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빛을 나누어주셨다. 사람들은 기쁨과 활력을 얻어서 돌아간다.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돌아간다. 그들은 자기의 필요를 채우고 돌아간다. 등을 돌리는 것이다. **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