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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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빛의 진동들

jo_nghyuk 2010. 2. 3. 23:34

 Thelonious Monk Blue Monk를 듣고 있다. 피아노는 확실히 물의 악기라는 생각이 든다. 타건을 할 때마다 건반 위에 파문이 돈다. 파동들이 고리처럼 서로 걸쳐질 때 협/불협의 하모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몽크는 기하학적 파문을 추구했었을 것이다. 예전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므로 재즈의 진동으로 스스로의 내부를 채우곤 했다. 많이 울던, 우울했던 시기를 보냈고 나는 점차 그 비슷한 진동을 찾아 헤맸다. 먼저는 라디오헤드였고 그 이후로는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 그리고 숱한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그 시절 내 안을 울음으로 가득 채웠던 것 같다. 그 물이 내 안에 가득 차는 일, 울음의 여진을 계속 지속시키는 일을 나는 스스로 비슷한 진동의 음악을 꼴라쥬해가며 수행해갔다.

울음은 진동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우는 일이다. 내 안은 기쁨의 진동으로 가득 찰 수도 있으며 우울의 진동으로 가득 찰 수도 있게 설계되어 있는 하나의 도시다. 백혈구와 적혈구의 헤드라이트를 단 피 차량행렬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상당히 조직적인 행정도시.

+의 진동이든, -의 진동이든 우리는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무엇을 거부하고 수용할 것인가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 이전에는, 계속해서 의 진동을 수용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공명할 것인지, 울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율이야말로 이러한 울림을, 공명함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인간반응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물체는 저항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는데 그 저항의 세기만큼 그것의 물질성이 결정된다.

전에 내가 어둠의 행실에, 어둠의 생각과 사고관념에 나를 내맡기며 점점 내 자신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우울해졌다면, 계속해서 빛의 행실과, 생각과 세계관에 나를 오픈하고 그 반대의 것에 대해 저항하고 대항하면서부터 나의 정체성은 점점 뚜렷해지고 밝아지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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