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아이슬란딕 2 본문

콜랴 크라소트킨

아이슬란딕 2

jo_nghyuk 2010. 2. 11. 00:20


기체가 난기류를 통과하면서였다. 옆자리의 사람이 커피를 쏟은 것은.

여자는 미안하다며 북유럽 특유의 서릿한 액센트의 영어로 사과를 했다. 나는 젖지 않았지만 바닥에 많이 흘린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비티카라고 했다. 얼음 같은 피부에 레몬 빛 블론드 헤어와 초록색 눈동자를 한 27살의 학생이었다. 마리는 일본과 한국에 여행 차 들렀다가 스키폴 공항을 경유해 핀란드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남은 몇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핀란드 사람이 정말 자기 전에 자일리톨을 씹는지에 대해서와, 핀란드와 한국 사람의 비슷한 낯가리는 성향에 대해서, 그리고 핀란드의 피요르드와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경도된 신뢰, 아니 그 이상의 신봉의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오류가 많은 인간을 대신해 정확한 기계가 모든 사무를 대신하는 문명을 주장하는 메시지를 가진 애니였는데 타이틀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모든 것이 명확해지게 될까. ‘모든 것을 클리어한다는 것은, 과정의 개연성은 없어지고 하나의 과정으로만 종결되어진다는 얘기잖아. 기계문명이 모든 계산을 가장 광범위한 분야부터 가장 미세한 분야까지 다 마치게 되면, 완벽무오한 답만이 존재하고 더 이상 개연성의 개입은 불가능하게 되지. 그러면 그 세계를 완벽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완벽하게 인간이 소외된 세계. 심연 또한 배제되어진 채, 폐쇄적인 소우주 속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의 트리거trigger들만이 존재할 뿐인 세계. 인간이 피사체로서만 존재하는 완벽한 자연주의적인 세계다. 마리의 말을 듣고 나니 언젠가부터 자연주의의 생태 속에 놓여진 피사체처럼 적응해가는 회사원 생활을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저쪽에서 톱니가 내려오면, 그것에 맞물려서 올라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톱니바퀴. 수천의 하나. 나 같은 톱니바퀴들이 빼곡히 박힌 것이 나의 회사고 이러한 회사들이 메인보드 같은 도심 위에 하드웨어처럼 수천 개가 복잡하고 깔끔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 아이슬란드일까. 하고 스튜어디스가 따라준 내 커피에 설탕을 삼분의 일 정도 쏟으면서 생각해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끌린 것 같지만, 사실 원시로의 복귀랄까. 숨돌림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하루는 반도체 같이 조그만 회사 안에서 발열하고 있는 오전과 백혈구와 적혈구 같은 전조등과 후미등을 달고 저마다의 거래처 기관을 향해 치열하게 달리는 도로 위의 오후, 그리고 배터리가 다 된 아이팟을 USB에 연결하듯 아파트 맨션에 기어들어가 지친 몸을 결합시키고 잠이 드는 새벽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한 주를 보내고, 몇 달을 보내다가, 연휴가 오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오는 사람들을 대면하고, 매년 먹는 음식을 먹고, 똑같은 인사치레를 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거야. 찻잔 옆에 흘린 미량의 설탕가루를 보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저 커피 속에 빠져 들지 않은 설탕가루 같다고도 느껴졌다. 일상 속에 녹아 들지 않은 시간을 들고 나는 다른 어딘가로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초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 아이슬란드까지 와서 유빙 얼음조각을 깨먹는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내 원시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시간이 얼어붙은 북극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는 헤드폰을 끼고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틀어놓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잠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각설탕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며 서로 칼싸움을 하다가 부숴진 가루들이 커피 속으로 와르르 떨어지는 꿈을.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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