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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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랴 크라소트킨

아이슬란딕 4

jo_nghyuk 2010. 2. 23. 17:38

 비행기 창문 밖으로 케플라빅 공항이 가까워진다. 덜컹, 거리며 엉덩이 밑 바퀴로부터 아이슬란드 위에 내려앉는 질감이 전해진다. 만년설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

cabin을 열고 가방을 꺼내느라 부산한 승객들 사이로 발 밑의 카메라 가방을 더듬거렸다.

?

 

끈끈한 질감이 카메라 가방에서 느껴졌다. 카메라를 꺼내어보니 식은 용암처럼 굳은 갈색 용액이 카메라 바디 전신에 들러붙어 있었다.    커피다.

 

마리.

 

하루 종일 젖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가까운 시간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로맨스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20시간이 다 되도록 카메라 바디에 커피 0.1리터가 들어간 줄도 모르는 방심상태에 놓여있을 정도면, 로맨스를 부정할 순 있어도 로맨스에 가까운 것까지 부정할 순 없는 것 같다.

 

눈물로 자욱진 듯한 무늬가 되어버린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일단은 Baggage Claim으로 배낭을 찾으러 갔다. 십여 분이 지나서 가방을 찾고, 공항을 나와 flybus에 승차했다. 커피에 젖은 카메라를 꺼내 뷰 파인더로 창 밖을 보았다. 셔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광막한 풍경 어디에도, 초점을 잡을 만한 부분은 뷰 파인더 안에 잡히지 앉았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버스는 조용하고 길고 부드러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도로 위에는 이 버스 한 대 뿐이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버스 기사 앞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았다. 오후 3 35.

 

 

카메라 가방에서 아이팟을 꺼내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았다. 다행히 가방 바깥 주머니에 있던 아이팟은 멀쩡한 것 같았다. amiina의 앨범을 플레이했다. 시규어 로스를 좋아하는 친구가 시규어 로스의 사촌 여동생 뻘쯤 되는 그룹이라며 준 앨범이었는데 곡 중에 seoul이라는 이름의 곡이 있었다. 친구는 그 곡이 한국으로부터 사온 종으로 연주를 해서 seoul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라고 했다. 나른한 곡조로부터 한국의 조그만 종들이 찰랑찰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이팟의 시각설정을 아이슬란드 시각으로 바꾸었다.

          

이곳의 3 40분은 이미 어스름이 지고 있지만 서울의 3 40분은 여전히 한창 발열 중일 것이다. 해가 내려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해가 지구 뒤로 돌아가버린 새벽 3 40분이라고 해도 서울은 여전히 발열 중일 것이다. 나는 아마도 겨울의 백야로부터 도주한 곰처럼 자꾸 느껴지는 것이었다.

 

멀리서 seoul의 차임 벨들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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