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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강영안 교수님 강연

jo_nghyuk 2012. 11. 5. 12:37

2012.10.25.(목) 정리: 이주일

 

✻ 완벽한 녹취는 아니고, 내용이 대체적으로 빠짐없이 포함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남의 책으로 이야기하려니까 편하진 않아요. 철학자들은 보통 죽은 사람들 책으로 이야기하는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 사실 죽은 사람들 책이 훨씬 익숙하거든요. 미로슬라브 볼프는 살아 있고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려요 (웃음) 제가 85년에 박사학위 했는데, 볼프는 86년. (웃음) 

 

우리가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디 가나 배척 받거나 칭찬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처음 서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것을 보면, 기독교인은 공식적으로 배척 받는 종교였죠. 순교하고. 나중에 국교가 되면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때 신앙은 수용이 안 되었지만, 기독교인은 어디서나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짐 월리스가 쓴, IVP모던 클래스, . 이게 9번째 책이네요. 제자도, 사회참여. 여기 보면 이야기가 잘 나와 있습니다. 병자를 돌본다든지, 장례 치르지 못한 시체를 장례 치러준다든지. 어린 아이들, 고아들을 돌본다든지. 그런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타자를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 수많은 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초기 교회 때 그리스도인이 어딜 가나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타인을 위한. 선교 120년 지난 지금 와서 보면 부끄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을 비난할 때 쓰는 몇 가지 형용사, 자기 중심적, 배타적, 이기적 이런 단어죠. 직장 동료로부터, 이웃으로부터, 타종교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이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학자에 따르면, 6.25를 기점으로 삼는데, 6.25 이후에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의 오리엔테이션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잠시 10년 전에 한국 교회의 신앙의 실천과 전통적 종교에 대해 글을 쓰느라고 들여다 본 적이 있는데, 윤채호 선생의 경우, 유교는 사람이 왕으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거지로 만드는 종교인데, 기독교는 사람이 거지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왕으로 만드는 종교다. 타락을 두고 하는 이야기겠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결국 아주 고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기독교다. 그래서 나라를 건질려면 유교로 안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두번째, 길선주 목사의 경우,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따른 종교는 썩은 동아줄과 같다. 절벽에 떨어져서 기어 올라 살아야 하는데, 유교, 선교, 도교는 썩어서 더 이상 타고 올라갈 수가 없다. 기독교는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다. 그래서 개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 유교나 도교 보다는 불교 영향을 받은, 샤머니즘화된 불교.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조용기 목사입니다. 그의 설교를 들여다보고, 동영상 보고 했는데. 장점도 많지만, 요약하면, 내세지향적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타당한 신앙. 지금 여기서 곧장 문제를 푸는 그런 신앙의 오리엔테이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는 주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산기도를 갔을 때, 내일 기도와서 내 설교를 듣는 사람이 다 문제해결을 받고 가게 해 주옵소서. 이게 늘 드리는 기도였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와 기도할 때, 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게 가정의 문제, 돈의 문제, 질병의 문제. 온갖 종류의 문제가 해결 받았습니다 하면서 나가는. 그런 방식의 설교, 교회의 오리엔테이션이 생긴 것이. 그 이후에 순복음교회 영향을 받지 않은 장로교도 영향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도 있지만, 거의 순복음화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걸 1950년으로 잡을 수 있고, 1960년으로 잡을 수도 있고.

 

저는 종교는 사회 속에서 두 가지 기능이 있지 않나 하는데, 개인의 욕구를 해결하고. 또 그 욕구를 넘어서 그걸 초월하고자 하는 방향. 그래서 다른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 있겠죠. 현대 한국 개신교는 초월이 약화되고 개인의 욕구가 최대화된 것이 아닌가. 욕구 중심의 기독교는,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달라고 할 때, 대부분 나이 많은 분들, 어머니, 아버지는 주로 자식들의 취직이나 건강, 가정의 평화. 이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죠.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첫번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가 앞서고 삶에 처한 상황들 보고, 시험, 악에서 피하게 해 달라.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것과 대부분의 제목이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대해 배타적인가. 다른 생각, 다른 교회. 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배타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가 보면, 자신이나 자기 집단.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타자는 이 때 배제가 되고, 이익이 될 때는 동반자이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무관심한 존재가 됩니다. 기독교에서 타자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 철학에서 타자가 매우 중요한 존재로 다루어졌지만,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타자는 거의 사실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볼프의 책이 지금부터 한 16년전에 나오면서, 타자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이미 어쨌든 이 책을 다 읽은 분은 저의 강의가 필요 없습니다. 책이 쉬운 책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꼼꼼히 읽지 않고서는 절대 끝까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읽었다면, 몇 가지 뼈대만 오늘 이야기하는거라.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읽지 않은 분들은, 크게 도움이 될까 조금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읽지 않은 분들도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고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진 마시고, 끝까지 들어보시고, 어렵긴 하지만 대단히 유익한 책이 되리라 생각하고. 대강 한 번 예고편 보는 것처럼, 조금 들어보고 스스로 저의 이야기에 승복을 하면, 저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게 하면 아마 이 책을 잡고 공부를 하게 될 것이구요. 아마 관심을 일으켜주지 않으면, 오늘 이걸로 볼프와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웃음) 모르겠습니다. 그건 저한테 달려 있기도 하고,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갈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나와 남 사이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한 세대와 뒤따라오는 세대 사이에, 한 지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한 종족과 다른 종족 사이에, 한 문명과 다른 문명 사이에 있어왔던 투쟁과 갈등이 문제 상황으로 등장합니다. 갈등이 있으면 싸움이 있고, 죽이고 복수가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삶은 갈등의 악순환으로 신음하게 되는 거죠. 이 땅의 삶은 홉스가 말한 용어를 쓰면, 하나의 시민 상태. 국가가 있는 상태로 말하지만, 사실상 자연 상태로 되돌아온 것 같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책 서두를 보면, 첫 구절이 혹시 우리가 도덕으로부터 속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도덕의 희생자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당히 도덕화되고 문명화된 상황에 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도 전쟁으로 인해서 심각하거든요. 지난 역사가 인간에게 준 교훈과 교육의 효과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볼프가 목도한 것이 1990년대에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 있죠? 볼프는 내 고향 크로아티아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갈등의 악순환에 사로잡힌 상황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 책은 그 결과이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전쟁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그 대안은 급진적입니다. 이 책을 보면, 정치적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저 뿌리까지, 래디칼, 그 말 그대로 밑뿌리까지 내려가서 뒤흔드는 그런 논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볼프가 내세운 대안이 급진적이 아니었다면, 볼프의 선생님, 유르겐 몰트만이 볼프에게 하지만 채트닉을 끌어안을 수 있겠는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채트닉은 크로아티아 사람을 무참히 죽인 전사들을 말합니다. 포용, 아니 포옹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선생 몰트만에게 던지는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인간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는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일이 있을 때, 양보하고 용서하고 할 때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갈등이 발생하는데, 나와 남을 구별하고 그것을 토대로 내 쪽에 속하는지 저 쪽에 속하는지, 편을 가르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죠. 갈등 상황은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 않고, 대개 소멸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말의 싸움이 생기고, 심지어 무력이 생기죠. 그래서 홉스의 자연 상태가 발생하는 겁니다. 홉스는 자연권이라고 부르는데, natural right 이것은 자연 상태, 즉 전쟁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하죠.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호모 호미니 루프스 Homo homini Lupus 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법을 정하는 겁니다. 실정법의 토대가 되는 법을 홉스는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natural law 이 자연법의 첫번째 조항이 상호조약입니다. 서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를 불러오는, 그러기 위해서 모든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고, 생존권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그것을 사회적 언약이라는 말로 표현했죠. 그렇게 해서 평화를 가능케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홉스가 법을 이야기한 것처럼, 칸트도 법에 호소하죠. 이 전통은 에라스무스로 가고, 휴고 그로티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인데요. 칸트는 국제법에 따르고, 하나의 강제적 기구로 국제 연합을 제안했죠. 유엔이 만들어진 것은 칸트의 영원한 평화론에서 제안한 것을 따랐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철학자, 키가 150센티밑터 밖에 안 되는 철학자가 유럽과 미국을 설득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적 방식, 홉스나 칸트의 해결 방식은 니것과 내 것을 구별하는 겁니다. 나의 영토와 너의 영토, 나의 민족과 너의 민족, 나의 종교와 너의 종교를 구별하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큼 너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런 해결 방식은 개신교, 카톨릭 문제를 해결할 때, 국가의 수장이 가진 종교가 그 영역의 종교가 되는 방식과 동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영역을 분리하고 그것을 존중하자. 근대적 방식은 영역의 존중과 그 분리를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극단적 배제나 극단적 포용을 지적하면서, 배제와 제거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습니다. 20세기 유럽 상황이나 위의 경험을 보면, 법을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1990년대는 볼프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발칸반도, 구 유고슬라비아죠. 인종 청소가 발생한 비참한 경험이 있었구요. 카톨릭, 이슬람, 정교회 등 종교적 차이가 나쁘게 작용한 경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전쟁터가 되었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30여년 동안 일본의 영토가 되었고, 한국 전쟁의 경험을 했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이 근대적 대안이 되는가. 근본적 물음을 묻게 한 사건이죠.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나라와 나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그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이 현실적인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여전히 20세기는 전쟁을 경험한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남한과 북한 여전히 군사적 대립 상태가 유지되고 있구요. 이런 상황에서 아마 하나의 대안은 법과 도덕에 대한 냉소주의자가 되는 것인데요. 아까 제가 레비나스 말 소개한 대로, 우리가 도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성의 토대 위에 법을 세웠는데, 도덕은 여전히 연약하고 법은 불의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정치는 곧 전쟁의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치가 이런 수단으로 여겨지는 한, 진실이나 정의, 평화를 기대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레비나스를 따라 과장해서 말하자면, 근대는 정치를 전쟁 기술로 봐서 평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볼프의 신학적 논의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눈 앞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대안이 될 수 없고, 포스트모던의 정치철학도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할 때, 즉 리요타르 등은 일치하려 하지 말고 차이를 만들라. 차이를 강조하고 차이화를 강조하는 철학도 해결책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볼프는 스스로 묻고 있는 것이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를 닮아 따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삶의 관점과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서 양 극단이 있을 거에요. 하나는 라인홀드 니버처럼, 심지어 동생인 리처드 니버로부터 비판 받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취할 것인가. 또 한 극단은 재세례파 존 요더처럼, 평화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예수 십자가의 관점과 만물의 회복을 기대하는 관점은 이 물음에 어떤 관점을 열어주는가. 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볼프는 매우 현실적인 물음을, 매우 이론적이면서 실천적 함의가 담긴 방식으로 여러 성경의 네거티브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두 부분인데, 배제, 포옹, 포용, 성 정체성을 다루는 게 한 부분이구요. 그 다음은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가치, 특히 정치 신학에서 다룰 중요한 개념, 진리, 진실이라는 개념, 정의라는 개념, 평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느 부분에서나 볼프의 신학적 이해의 탁월성이 드러납니다. 첫째 부분은 볼프 정치신학의 지향을 보여주구요. 둘째 부분은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관점에서 진실의 문제, 정의의 문제, 평화의 문제를 각각 다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볼프의 신학함의 특이함에 대해서 세 가지 포인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볼프의 논의 방식은 다루는 주제에 대한 한편으로는 근대적 관점을 보여주고요.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을 드러내서 비판하고, 그러면서 포스트모던적 해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성경의 내러티브로 되돌아가는 것이 볼프의 신학하는 아주 특이한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방법을 이처럼 아주 능란하게 구사한 신학자를 저는 보지 못했어요. 신학자 가운데 모더니즘을 곧장 따른 경우가 많았죠. 70년대 60년대는 대개 모더니즘을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니면 아예 아주 포스트 모던적인 신학자가 있었는데, 볼프는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다양하게 섭렵하면서, 포스트모던으로 모던을 비판해요. 그러면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생각할 정도로 전개하는데, 그리고 다시 벗어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전개를 합니다. 

 

어릴 때 신학을 공부한다고 잠시, 저의 첫사랑은 신학이었습니다. 아니 문학이었을 거에요. 첫사랑은 아니네요. 시 쓰고 소설 쓰고 그런 걸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신학에 발을 들였는데, 처음에 벌코프의 조직신학이었어요. 신의 존재, 신의 공유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 그 다음에 삼위일체가 나오더라구요. 왜 이렇게 나오나 몰랐어요. 나중에 철학을 보니까, 철학의 영향 때문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습관이 다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이런 관심이 있는데. 볼프는 철학과 신학 사이에 왔다갔다하는게 아니라,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그런 눈으로 보면, 성경은 아주 래디컬하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물음을 주고, 그 물음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다시 물음을 얻는, 그러다가 래디컬한 대안을 준다는 것이죠. 이런 방식을 세 가지로 말하면, 대화하고 대결하고 대안을 찾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상당히 어떤 문제, 주제를 다루더라도 볼프의 신학하는 방식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볼프의 신학 방법은 대화론적이다. 동시에 성경의 내러티브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성경 신학적이다. 부인이 성경 신학자니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외교적 수사인지(웃음) 모르지만, 확실히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두번째, 볼프의 신학함의 특징은,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볼프의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 내어주심, self-giving은 희생자와 억울한 사람만을 생각할 수 있는데, 볼프는 그리스도의 내어주심은 가해자의 죄책조차 짊어지신 사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품으시는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볼프는 폭력에 대한 도전을 보게 됩니다. 인간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 발음이 좀 이상하죠? (웃음)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는 희생양 만들기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지라르에게 동의하죠.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볼프는 예수가 폭력을 스스로 받음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었다. 지라르와 같은 해석이지만, 지라르는 대속적 희생은 받아들이지 않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깨뜨린 사건이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폭력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어버린 종교다. 볼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는 폭력을 예수님이 수동적으로 당할 뿐 아니라 사탄의 세력을 쳐서 이긴 사건이라고 보는 거죠. 승리자 그리스도, Christus Victor 볼프는 이걸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 기만과 불의의 가해자도 받아들인 사건이다. 이 부분은 자세 이야기 못합니다만, 해당 부분을 읽어보시면, 신학적 사유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는 구세주일 뿐 아니라,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가 삶의 중심이 됨으로써,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이해하죠. 다시 말해서, 중심의 재설정을 통해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실과 정의와 평화의 선결조건이라고 말하죠. 여기서 설명을 더 하자면,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참된 주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죠.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주체, 역사의 창조자 주체 그 개념이 아니고, 포스트모던적인 라캉의 깨어진 주체, 아니면 데리다의 타자의 타자라든지, 그런 방식으로 나가지 않고,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레비나스의 주체에 가까운 개념을 내세웁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밥먹고 걸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de-centered subject 중심에서 밀려나서 변화된 자기의 모습으로 주체를 다시 규정하는 방식, 그것을 중심의 재설정이라 볼프는 표현을 하고 있죠. 그 중심의 재설정을 통해서 타자를 향해 개방된 주체, 개방된 자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타자의 개방된 타자는 타인을 개방된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세번째, 볼프의 신학하는 방식, 볼프의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볼프는 자기가 논의하는 신학이 곧장 현실 정치에 적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학을 오바마가 실현하시오. 이명박 대통령이 실현하시오라고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볼프의 주장은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사도들의 가르침 때문에 이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현실 정치에 그 주장이 곧장 적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그것이 현실적이고 그것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세상의 일원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대안적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야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실과 정의, 평화뿐 아니라 배제와 포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다루는 배제, 포용, 성 정체성, 진리, 정의, 평화 이 여섯 개 주제인데요. 다 아까 이야기한 방법, 뭐였지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통해서 래디컬한 대안을 찾아내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게 다 깔려 있습니다. 이게 제가 발견한 볼프의 신학함의 아주 기본적인 특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볼프는 두 가지를 대비시키는데요. 여섯가지 주제를 다룰 때, social arrangement 사회적 배치, 구조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볼프가 칼 맑스의 노동 철학을 박사 학위에서 다뤘지만, 이 방식으로 신학을 전개하지 않고, social agent 의 문제로 왜 그러냐 하면 통로가 종말론적이다라는 겁니다. 크리스챤들의 아이덴티티 변화 없이는, 이 신학이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길이 좀 울퉁불퉁할 수 있는데요. 바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근대성의 문화란, 포함의 문화라고 보는데, 배제된 것을 동일자로 포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이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자신들의 관리 영역으로 흡수하고 통합한, 그 역사가 근대의 역사잖아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팽창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함시키는 과정이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과정에서 아무 상관 없던 그 지역들이 들어오긴 하는데, 그렇게 들어온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기보다는 적대적 타자의 관계에 놓게 되고, 동일자의 타자로 흡수하기 전에도 여전히 타자로서 배제하게 된 그런 역사를 보게 된 것이죠. 일본이 내선일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는 일본, 선은 조선, 조선과 일본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면서 포함을 시켰지만, 사실상 우리의 말, 우리의 이름 다 없애고 일본어 교육시키고 일본어 말하게 하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 전통 조선을 배제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이것이 하나의 근대의 과정이라 볼 수가 있는 것이죠. 포함을 향한 일관된 충동은 분리하는 모든 경결을 무너뜨리고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외부의 형성을 중성화하고자 한다. 유럽 최근세사에서는 이렇게 동일자로 흡수하는 것과 반대로, 극단적으로 배제의 결과를 취하기도 하는데, 발칸반도 전쟁에서 크로아티아를 배제하고, 히틀러의 나치즘, 국가사회주의처럼 유대인이나 집시나 그런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죠. 그런데 그 방식을 보면 첫째, 연결된 이음새를 잘라낼 수 있는 것이죠. 극단적 독립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태도,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외부의 민족을 제거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자와 나 사이의 정당한 분리를 지워버리는 분리의 부정. 이것이 종족 사이에서는 종족 살상으로 나타나고, 종교 사이에서는 타종교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살인으로 귀결되죠.

 

볼프는 아주 긴 호흡으로 그 대답을 전개해요. 아주 뛰어난 솜씨의 퀼트를 전개하는 것처럼, 여러 과제를 통해서 여러 면들을 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탁 요점을 짚자면, 나와 타인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문제죠. 볼프 특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모던적이고 또 포스트모던적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내가 중심 타자가 주변화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중심에 서고, 물론 각자가 다 그렇게 설 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가 아닌 타자는 내 주변에 서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의 방식에 대해, 포스트모던적 대안은 리처드 로티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 교수였는데, 나중에 철학 교수를 팽개치고 인문학자가 되어서 버지니아 대학에서 교수하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은퇴한 미국의 대중적인 철학자가 된 사람인데요. 로티는 자아와 타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있는 존재라고 봐요. self-creation. 볼프의 책에 이 용어는 안 나오지만, 로티의 사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과 타인과 연대하는 것, 특히 타인의 고통과 연대하는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로티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내가 왜 타인과 연대해야 하는가. 이유는 하나, 내가 타인으로부터 잔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나와 타인의 관계는 우연한(contingent)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라고 로티의 책 이름이 달려 있는데, 여기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볼프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의 형성 계기로 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아이덴티티는 타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분리와 연결이 중요합니다. 분리를 긍정하고 동시에 연결을 긍정하는 방식이죠. 나와 타인은 다른 몸을 가진 개체로서 타인과 분리됩니다. 내가 앉은 노종문 간사와 내가 다른 것은, 다른 공간을 차지하잖아요. 그러나 비키세요 하고 나를 밀치고 여기 설 수 있어요. 안 그러겠지만 (웃음) 내가 차지하는 공간과 노종문 간사가 차지하는 공간이 다르죠. 몸이 다르니까. 그런데 몸을 경계짓고 있는게 뭡니까. 경계짓는 경계선이 뭐죠? 이 피부가 나와 타인을 경계지어줍니다. 성관계는 침투하고 하나된 관계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것도 외벽과 외부, 피부와 피부의 접촉이지 피부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않아요. 주사바늘만 침투해 들어가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거지. 피부를 침투해 들어갈 수 없어요. 침투해 들어가면 일종의 폭력, 피부의 경계선을 통해 구별됩니다. 이 분리는 근본적 분리입니다. 우리가 다른 몸의 자루를, 불교 스님들은 똥자루라고 하죠. 그래서 남을 대신해 자줄 수도 없구요, 남을 대신해서 먹어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어요. 내가 배고프면 내가 먹어야 하고, 내가 졸리면 내가 자야 하고. 내가 목마르면 내가 마셔야 해요. 이 분리가 인간의 근본적 사실이에요. 그걸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타인을 분리하고 철폐하거나 무시하거나 방치해서 연결을 없애버리는 것은 죄라고 보는 것이 볼프의 관점입니다. 분리와 연결을 긍정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죄다. 나와 타자는 그런 관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 문제가 발생하잖아요? 크로아티아 사람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피해자고, 볼프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세르비아인은 가해자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선한 사람입니다. 물론, 니체는 피해자와 약자를 비난하죠. 그러나 볼프는 피해자와 가해자는 둘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물론 차이도 있죠. 이런 식으로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포함과 배제와 도식이 작용한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볼프는 피해자 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수용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주장합니다. 몰트만은 그렇지만 채트닉도 포용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볼프는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도 거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악인도 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이 보호하신 일도 십자가 이전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가인을 받아들여주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볼프는 가인 자신이 시작한 배제의 수단에 가인을 내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포옹에 대해 가인은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가는 삶을 살았죠.

 

3장에서 훨씬 심화되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이야기가 절반을 넘는 것 같은데, 최대한 짧게 해보겠습니다. 포용을 이야기하는 단계에서는 4가지가 중요합니다. 첫번째가 회개이고, 용서이고, 세번째가 포용이고, 네번째가 망각입니다. 포용의 단계가 회개한 것, 잘못한 것에 대한 회개. 누구나 회개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남을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죄책의 억압과 운명에 대한 완고한 신념으로부터의 해방, 스스로 가두어 놓은 무감각함과 반항이라는 장치에 대해 해방되는 것이죠. 용서가 그렇게 쉬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용서가 쉽지 않은 까닭은 해를 입을 때,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은 항상 대적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엎지른 물을 대야에 다시 담을 수 없는 겁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서, 볼프는 편파성의 공격, 불가역성의 공격이라고 합니다. 편파성의 공격은 한 번 해를 입으면, 저쪽 편에 대항하는 하나의 편을 만들고 빠져나올 수 없다. 불가역성의 공격은, 한 번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 이 두 공격으로부터 상대방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죠. 가해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죠. 복수를 하지 않으니까, 저스티스를 실행 못한 거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게 최소한의 저스티거든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injustice 라는 거에요. 그것은 폭력을 가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creative injustice 라는 것이죠. 창조적 불의, 용서를 해야 회복할 수 있다.

 

세번째 단계가 회개, 용서, 포용입니다. 포용을 보여주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경우인데. 이레나이우스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데 볼프는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의 완성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종말에 가능한다. 볼프는 니체를 따라서 과거에 대한 구속 없이는 최종적 구속이 가능하지 않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과거를 건져내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죄악을 잊기 위해서만 기억하신다. 그렇다면 희생자의 외침은 어떻게 해야 하나? 볼프는 일단 그렇다고 긍정하는데, 메시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의 외침이 살아있게 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기억하기는, 언젠가 잊게될 소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포용의 한 예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아주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자세하게 탕자의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다루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만 (웃음)

 

볼프에게, 가해자의 정의냐, 피해자의 정의냐. 가진자의 정의냐. 이런 것이 포스트모던 정의 개념이죠. 매킨타이어의. 볼프는 여기에 대해 한편으로 동의해요.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역사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이중적 보기라는 건데요. 한나 아렌트한테 빌려온 용어인데요. 볼프의 논의는 현대 철학자들의 논의에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중적 보기는 이 입장에서도 볼 수 있고, 저 입장에서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실천하자는 것이죠. 여기서도 십자가가 중심에 있는데요. 이중적 보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변화가 형성되는가. 볼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의에 대한 판단과 불의에 대한 싸움을 타자의 눈으로 보며, 내가 피해자일 수도 있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위치 바꾸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모르겠어요. 이게 얼마나 가해자에게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정의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중적 보기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불의에 대해 싸울 수 있겠는가? 볼프는 중립성의 관점을 의심하고, 강한자의 관점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약한 자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강한 자는 논의와 선전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고, 약자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자를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라인홀드 니버 등 사랑과 정의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에, 볼프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월터스토프와 볼프가 오래 같이 지냈죠. 예일에서 은퇴한게 2002년, 2003년에 노털담에 왔다가. 그 어간에 월터스토프가 예일에서 은퇴했는데요. 볼프가 2003년에 예일에 갔는데, 몇년은 같이 지내며 토론했습니다. 월터스토프가 Right and Wrong을 냈구요. 또, Justice in Love를 냈어요. 이것이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볼프도 같은 개념입니다.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 불편부당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편애하시는 분이라고 나오잖아요. 불편부당하지 않죠. 억울함을 신원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인데. 사랑 없이 정의가 없다. 아이덴티티와 정의의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초연한 태도만 강조하던 것에서, 관계의 지속을 추구하고,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으로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오순절 이후 헬레파 히브리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예로 드는데, 헬라파 사람들이 배제당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겠다. 먹이는 일, 거기서 집사, 일꾼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스데반이 대표적이죠. 빌립.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 하나도 없어요. 다 헬라파입니다. 7명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과부들 뿐만 아니라, 모든 과부들을 돌보도록, 그런 방식으로 한 것이 정의로웠다. 헬라파 사람 3명, 히브리파 사람 3명. 이게 아니라 헬라파 사람만 뽑은 것이죠. 그것이 더 정의로웠다. 

 

둘째는 진실입니다. 사실에 근거를 두는 것이죠. 진실을 권력 투쟁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게 모더니즘의 목표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목표는 법률이나 의미, 진리라는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과 그 대결을 폭로하는 것. 푸코는 지식이 곧 권력이다. 사실 칸트는 감히 알려고 하라. 아는 것이 해방이니까. 그러나 푸코는 지식이 사람을 통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이런 상황에서 지식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거기로부터와 여기로부터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 바깥으로 넘어가야 한다. 평범한 진리로 알고 있는 것이 추악한 편견의 산물임을 알고 있다. 둘째,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야 하나? 진실을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에, 내 편에만 있어서는 진실을 볼 수 없으니까. 왔다갔다 하기. 이중적 보기의 실천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진실을 보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서강대에 오면, 진리에 순종하라는 말이 나와요. 진리에 순종할 마음이 있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볼프는 그것이 진실한 성품의 결과라고 봅니다. 진실한 삶, 그런데 진실한 삶은 동시에 사랑을 요구합니다. 볼프에 따르면, 사람을 포용할 의지, 공동체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성경은 진리를 행한다. 그런 말을 잘 써요. Doing Truth, 진리를 항상 행함의 관점에서 보잖아요. 그래서 볼프는 진실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에메트라는 말이 원래 아만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것인데, 견고하고 튼튼하고 그래서 신뢰할만하다. 그래서 진실이라는 것은 신뢰할 만하다. 포도나무가 신뢰할만하다 참되다 그것은, 농부의 수고에 열매를 반드시 준다.

 

마지막 평화의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볼프는 평화에 대해서도 근대적 시각과 포스트모던 시각, 들루즈. 우리나라는 들뢰즈라고 하죠. 들뢰즈가 비판한 것을 다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폭력의 순환을 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 불의를 끊어 안는 하나님의 포용을 보여주는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볼프는 예수의 다른 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예수의 백마를 타고 진멸하는. 폭력의 다른 면을 봅니다. 거기서 폭력과 예수의 또다른 면을 드러내죠. 말탄 자의 폭력에 괴로움을 당할 자들은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린 사람들. 이들에게서 말탄 이는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는 이입니다. 물음은 왜 이들을 심판하는 것이 폭력적일까. 볼프의 답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누구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기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의 강력한 끌어당김을 끝까지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거죠. 볼프에 따르면, 십자가는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백마를 탄 예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만과 불의, 폭력.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폭력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오직 폭력을 하나님만이 행하시도록 하는 데 있다. 사람이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의무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정당한 행동을 가지고 폭력을 할 수 있나? 볼프는 하나님만이 폭력을 독점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아래 모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해설 초두에 썼습니다만, 이 책은 쉽지 않고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책상에서 편하게 쓴 책이 아니라, 가슴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대화하면서, 문제를 철저하게 따져가는 그런 학자입니다. 

 

볼프는 오순절 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났고, 자기는 목사 아들이라는 게 그렇게 창피스러웠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치하였으니까. 학교에서도 창피를 주고, 그러다가 자형, 나이는 같아요. 쿠스믹인데. 고든 콘웰 선교학 교수인데,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을 하게 되고 미국에서. 오랜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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