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복음의 능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복음의 능력

jo_nghyuk 2012. 11. 9. 19:28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 내가 죽으려 할 때,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를 제껴두고, 내 십자가를 세우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자아가 절대 죽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약하심이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다. 내 죄를 위한 하나님의 적응accommodation이다. 이 적응은, 나를 위해 어리석어 지셨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 약해지셨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사랑은, 죄를 넘어 그 사람을 본다. 약해지지 않으면 저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 어리석어 지지 않으면 저편으로 갈 수 없다. 사랑은 나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겸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는 것이며, 나를 죽이고 너를 살리는 것이다. 도덕적인 노력과 의지 이전에,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이 사랑을 믿지 못하면, 이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의 이유가 약하고 어리석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낮아짐이며 동일화이며 적응임을 깨닫지 못하면, 복음의 능력은 저의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8-10)

죄에 대한 승리는 이 시점에서부터 일어난다. 내가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내 죄가 아니라 나를 계속 주시하고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으시고 나의 옛 자아를 죽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순간, 마침내 변화의 기적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은혜가 연약을 덮고, 생명이 죽음을 삼키고, 대속이 죄의 효력을 없애고, 성령이 육신을 철저하게 사로잡는다. 동시에 자유케 하고, 인도하며, 순종할 수 있는 의지와 기쁨과 힘을 주신다. 
죄를 나의 힘으로 이기려 하지 마라. "대속"의 개념이 없다면,  스스로의 십자가를 세우는 일일 따름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세우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대속 이후이고, 후자는 스스로에 대한 속죄의 노력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빛 가운데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죄의 고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고백할 필요는 없으나, 타인 앞에서의 고백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빛에 나를 내어보이게 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하고 감시해줄 수 있게 하는 유익함이 많다. 

복음의 능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믿음을 통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며,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덮으며, 소망을 통해 모든 것을 인내하며 기쁨으로 면류관을 위해, 온전함을 위해 달리게 해주는 것이 참된 복음의 영성이다.

"사랑의 빛이 두려움을 떠나가게 하고, 우리는 자유해지며, 순결하고, 비로소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인내의 경주를 달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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