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늑대와 늑대 공동체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늑대와 늑대 공동체

jo_nghyuk 2012. 11. 17. 11:30
그러니까 성화는 결국 성도를 자유 가운데로 이끈다. 이 성화의 여정 중에 혹시 자기 성화나 자기 경건에서 오는 긴장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오히려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긴장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 성령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나 벌 때문에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중 은혜의 하나로써 한없는 사랑 가운데서 견인되어지고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피동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한 출발선상에 있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접붙여져야 시작할 수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되어진 순간부터 피동적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잠잠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접붙여진 후에, 그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행위도 거룩해진다는 깔뱅의 말은 옳다. 이 접붙임은 단순히 신념이 아니다. 말 뿐인 접붙임으로는 그는 다시 자기 성화의 막다른 길로 질주할 뿐이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의 기적적인 교통으로 예수님과 접붙여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한가지를 더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우리의 공동체, 성도들과도 함께 접붙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에베소서 4:16)
이 또한 성령의 교통으로만 가능하다. 본회퍼가 지적했듯, 이 공동체의 교통이 성령의 아가페적인 교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성취적이며 자기 쾌락적인 인간의 에로스적 교제라면,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선한지에 관계없이) 그 교통은 성령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의 것에 가깝게 된다는 견해에도 나는 동의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와 연결되어지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이웃과 연결되어지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를 내어주는 봉사와 헌신, 희생과 사랑으로 이 연결된 지체의 몸,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공동체, 교회,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온전하게 하며, 자라나게 하며, 성화시킬 수 있다. 성화는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교회를 넘어 사회로 편만하게 나가는 것이 진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로 떨어져 혼자 성화를 이룰 수 없다. 자기 보기에는 경건에 좋을지 모르나, 그가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때는 상황적인 맥락이 없으므로 전혀 영향력 없는 "녹지 못하는 소금"이 될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경건은 "이웃을 위해 죽으신, 세상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과 전혀 반대되는 경건이라 할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예수의 대속이 아닌 경건은 자기 경건일 뿐이며 타자를 배제하는 경건이라고 옳게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성화를 경건주의적으로 접근해서는 나-그리스도 / 타자-사회 를 구분할 뿐이다. 성화는 오직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하고, 이웃과 연결되어야 한다. 나의 연약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이웃을 통해 보충받는다. (강조하자면, 목회자의 연약이 오히려 성도들을 통해 보충받는 경우도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만을 생각한 나머지 목회자를 슈퍼히어로 내지는 괴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연약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를 통해 보충받는다. 이것은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연결되어서 자라나게 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와 그리스도만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나와 이웃의 성령의 교제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전자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그리고 실상은 무능한) 수도사가 될 것이고 후자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방향성 없으며 타협 투성이이며 부드러울 지는 모르나 (역시 무능한) 영적 어린이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에서는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충만함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말씀이 충만히 거하게 하며, 찬송의 삶을 지속하라고 권면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강한 동시에 치명적으로 연약하다. 어쩌면 강함 뒤에 연약의 얼굴이 붙어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다른 말로 하면 강해보이나 치명적으로 연약한 것일 수도 있다. 본회퍼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강건해보이고, 담대해보이며, 충만해 보일지 모르나, 감옥에서의 혼자가 되면 나는 한없이 치명적이고 나약한 존재의 우물을 품고 있는 인간일 뿐임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협력이 중요하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서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투명한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공급을 이웃으로부터, 나로부터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해서 흘러오고 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관계의 끈을 끊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이 관계가 썩지 않고, 타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깨어 있는 시간이 중요하며, 이웃 안에서 "점검받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웃을 점검하되, 검열하지 말라!) 네덜란드인들의 집은 투명한 창이 하나의 외벽이다. 칼빈의 정직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디티에스를 가면 개개인에게 "자기만의 방"을 준다. 스스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을 은밀하게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과의 교제를 할 때는 항상 "자기만의 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복도에 지나가는 이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제에 있어서 이 투명함에 성령의 힘이 역사한다. 통회와 자복의 투명한 회개 뒤에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나는 본다. 

성화는 사회를 향해서도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교제를 나누며, 은사를 나누듯이, 사회 안에서도 우리의 은사로 섬겨야 할 것이다. 깔뱅은 사회가 가진 은사들을 또한 우리가 겸손히 받아서 공급받을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철학, 인문학, 예술,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이것은 적용된다.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분야에 우리의 은사로 사회의 성화를 위해 섬겨야 할 것이다. 더 사회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어둠의 추악함으로부터 인간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치는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피켓 시위보다 영화 한 편이 더 파급력이 큰 세상이다. 문화의 콘텐츠 하나가 전세계로 퍼지고, 공유되며, 법률이 개정되고, 온 관심이 집중되고,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 가운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영적인" 것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깔뱅이 지적하듯, 모든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창조력에도 연관됨을 알고, 그 "성령의 은사"를 사회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성령을 통해서" "사랑의 끈으로" 풍성하게 사용하고, 공급하고,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늑대인 동시에 늑대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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