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자유와 원칙 사이의 도랑, 건너고, 건너지 않고.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자유와 원칙 사이의 도랑, 건너고, 건너지 않고.

jo_nghyuk 2012. 11. 20. 00:17
자유와 원칙의 변증법은 계속해서 순환할 것이다. 지구 저편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의 소리가 외쳐질 것이고, 해방에 대한 기쁨으로, 참된 (나는 이것은 예술가적인 자유라고 말하는 것 이외의 가장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자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전히 그 자유로 생겨난 부스럼들과 허물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해서는 원칙이 따라가야 한다. 방향타가 없는 자유는 없다. 올바른 방향타가 있는 자유는 놀랍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참되고 완벽한, 창조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누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성령을 통해 열매맺고 있음을 확신하자. 억누르는 두려움의 자유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자유가 절제 (혹은 근신)의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해 거룩한 열정으로 승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자유를 가장 크게 느낄 때는 단연, 찬양의 제사를 드릴 때이다. 그것도 가장 예술적인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예술적 방법이라 함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기쁨과 감사를 품은 어린아이의 상태로 온 힘을 다해, 또한 자연스럽게 꽃처럼 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고, 쥐어짜지 않는다. 나는 진정으로 자유한 모습으로 나를 표현한다. 여기에는 두려움으로 눈치보는 아이는 없다. 대신 유약하고 섬세하고 다소 조심스럽고 수줍은 아이가 있다. 그의 입가에 만면의 미소가 퍼진다. 웃음을 멈출 수 없다. 춤을 멈출 수 없다. 기쁨을 막을 수 없다. 사랑을 있는 힘껏 다해 표현한다. 나는 이순간 깨닫는다. 이 아가페 사랑으로, 나의 아빠를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기쁘게 하고, 마찬가지로 나의 이웃을 온 힘과 정성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자유라는 것을, 최고의 예술이며, 최고의 예배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절제라는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절대
두려워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물론 공통점은 있다. 나에게 준 능력 (자유)로 도랑을 함부로 넘었을 때의 결과는 참혹하다는 것이다. 자의적인 판단은 성령이 아닌 미혹의 영에 나를 노출시킨다. 그러나 주의 자녀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근신) 한다. 자신이 어린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계가 있는 유한적 존재이며, 유약하고, 연약하며,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놀라움과 기적들과 온갖 권세와 영광이 도랑 건너편에 있다고 해도, 순종의 영을 받은 자녀는 절대 그것을 건너지 않는다. 그는 전적으로 자녀의 영을 받아 움직이고 있으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멈출 줄을 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함께" 있는 그는, 움직여도 자유롭고, 멈춰도 자유로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놀라운 것은,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경험 밖으로 나와서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성경적으로" 그것을 통찰하고 분별할 수 있는 원칙적인 측면을 또한 우리에게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원칙은 계속해서 순환되어야 한다. 자유는 원칙으로, 원칙은 다시 자유로 가는 겸비와 담대함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 전환의 순간을 아는 분별도 역시 우리에게 요구되어질 것이다. 지성과 감성과 영성에 있어 우리는 참으로 예리해지며, 풍성해지며, 건강해져야 한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다. 


암스테르담에서, 개폐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