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하나이지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자유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하나이지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자유

jo_nghyuk 2012. 11. 21. 17:17
그러므로 두가지 자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말 모든 것에 대한 자유, 성령은 이 억압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역사한다. 이 자유에 놓여질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질문한다: 무엇이 나에게 방향성을 제공하는가? 나는 이 자율성을 가지고 어떤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자의성이라기 보다는 의문이다. 그는 말씀 안에서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그를 자유케 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의지도 없다. 
여기에서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접점을 오직 성령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대답은 주어진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어린 아이의 행실을 버리고 어른의 행실을 취하라' 그가 기도를 통해,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읊조리면서 그의 안에 풍성하게 함을 통해, 또한 시와 찬양과 신령한 노래로 연약한 모습 그 자체를 임재 안에 놓음을 통해 그는 성령을 통하여 그 길이 '불가능'에서 '가능'의 트랙으로 전환된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의로움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 두번째 자유라는 것을, 참으로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이 자유는 바르트가 말했듯, 죄의 자유, 비자유가 되는 자의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자유, 즉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한 자유이다. 동시에 이웃을 위한 자유이며 이때 나의 정체성은 하나도 억압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 이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은 은혜와 성령의 신비에 놓여있다. 왜냐면, 영과 육 가운데 여전히 우리는 사실의 명료성과 방편의 모호성에 난 사잇길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자유의 여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상의 끝은 의로움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두가지 자유의 신비이다. 
상한 갈대의 상태에서 회복으로 나아가고, 연기와 타는 부지깽이에서 불꽃으로 승화한다.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이며, 율법이 아니라 돌봄이며 사랑이며 용납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경주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법, 율법은 범죄를 막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내부에서부터 생성되는 또 하나의 법을 주신다. 이것은 사랑이며, 나와 이웃을 살리는 법칙이다. 이 법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발생되는 것이므로 억압이 아니라 해방을 가리킨다. 동시에 나 자신을 적시고, 타자에게로 흘러간다. 나에게로 수렴되는 이기성이 아니라, 타자에게로 흐를수록 나 또한 가득 적시는 공동체적인 법칙이 예수를 통해 주어진 사랑의 법이다. 이제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 이제 강한 자는 자신의 힘을 행사함으로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상대방에게 부여empower해주며 섬긴다. 이것이 성령이 임할 때의 피조세계에 일어나는 국면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나와 신을 잇게 하고, 의를 잇게 하는 이음매일 뿐 아니라, 타자와 나 사이에 권력의 차이로 인해 연결될 수 없던 부분을 이어주는 이음매도 된다. 이 이음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오고, 타자에게로 흘러나간다. 개개인은 신과 단단히 연결된 동시에, 이웃과도 단단히 연결되어진다. 

참된 자유는 그러므로 이 두가지를 필연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한 자유, 그리고 순종할 수 있는 자유. 이 두가지가 참으로 상반된 극에 위치한 듯 보이지만, 성령은 이 두가지를 다 우리에게 가져오시고 가능케 하신다. 우리는 이 두 극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실은 명료하고, 방편은 다소 모호할 수 있다. 선한 것에는 지혜로운 장성한 자이나, 악한 것에는 어리석은 유아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으로 순결한 동시에, 성령을 벗어나면 참으로 위험하고 더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언급하며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신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리고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동시에 장성한 어른처럼 지각을 사용하여 이 모호성과 명료성 사이의 다리를 건너가라. (그렇다면 결국 도랑을 건너는 것 또한 성령의 다리로만 이음매가 생긴다는 결론에 나는 도착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불 속을 뚫고 모든 생명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명에게 다가올 때, 그의 모습은 위엄에 찬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약한 생명보다 더 여린 모습으로 (오히려 기어오는 듯한 비천한 모양새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권능을 타자의 생명을 위해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다. 나는 이제 울고 싶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버지와 아들.
긴카쿠지, 교토, 201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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