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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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jo_nghyuk 2012. 11. 25. 16:06
참된 충성에는 경직이 없다.

이 충성의 근원은 자유이다. 성령은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 이 자유에서 충성할 수 있는 자유로 신자는 나아간다.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외부에서 강요하는 충성은 억압이고 폭력이다. 그러나 이 충성은 내부에서부터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 충성은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연약한 죄인이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내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를 임재를 통해 움직여가신다. 이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요가 아니라 요청이며 먼 곳으로부터의 손짓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맞잡은 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씩 우리가 속해있던 미궁을 빠져나온다.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는 중이다.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끝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광야는 광야를 위한 광야가 아니다. 충성이 충성을 위한 충성이 아닌 것처럼. 광야는 해방을 위한 정도이며 첩경이며 험곡이다. 충성은 자유를 위한 절제이며 포기이며 위탁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 전체를 그분의 손에 위탁함과 동시에 우리 존재 전체를 고스란히 돌려받는다. 그러나 돌려받는 그 때에는 나 자신만을 돌려받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함께 돌려주신다. 신랑과 신부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손을 잡고 걸어가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떨어질 수 없다. 이 손을 잡고 있을 때에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되는데 이것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분에 의해 변화되고 풍성해지는 유연을 향해 나아가는 정체성이다. 물가에 심기워 고정된 나무야말로 풍성함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행복하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충성하게 된다. 그의 충성은 경직이 없는 충성이다. 그 충성의 근원이 완전한 자유임을 그는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걸어가는 도상 위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 자유가 자신의 발 밑에서 다치지 않게 보호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충성된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뛰어내리는 법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든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그는 쟁기를 잡은 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는 앞에 계시다. 물론 옆에도 계시고 뒤에도 계시고 밑에도 계시나 그는 그리스도의 자유를 시험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주 하나님을 감히 시험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믿고 잘 알고 있다. 자유가 없어보인다고 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님을, 기쁨이 없어보인다고 해서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님을,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영원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해진다. 하나님이 자신을 강건하게 하셨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그의 정직이다. 그의 몸이, 그의 마음이, 그의 생각이 정반대의 것을 격렬하게 주장한다.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라, 자유를 시험하라, 너의 발을 여전히 지켜주실 것이다, 안전하다, 뛰어내리라. 

그러나 그는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느라 뒤를 돌아보거나 밑을 보지도 않는다. 
그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기 때문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꾸 밑으로 뛰어내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인하려 든다. 자꾸 뒤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충성된 종은 묵묵히 걷는다. 첩경 중에도 묵묵히 달려간다. 험곡을 지나며 몸에서 피가 흘러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충성은 경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온 의무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충성은 그의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발원한 깊은 강과도 같이 충성은 깨끗하게 흘러간다. 그의 충성은 경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충성은 팽팽하다. 잘 조율된 기타의 현과도 같이 그의 충성은 아름다운 하모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가 된다. 

그러나 그가 잠시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쓰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자기 성화와 자기 의, 자기 충성으로 살지 않는다. 그의 충성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이웃에게로 흐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잠시 멈춘다. 그리고 넘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이웃을 일으켜 세우고 그를 돌본다. 자신이 가는 길이 지체된다. 자신의 행로가 변경된다. 예수를 엠마오 도상에서 만난 제자들은 예수의 행로를 지체시킬 수 있었다. 예수가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꾸짖음을 받았겠지만, 예수는 부활의 새로운 법칙 가운데 있었다. 그는 이미 죽었고, 제대로 살아있다. 그러므로 충성된 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자기 경건에 몰두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금식을 그치고 이웃을 환대하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해야하는 충성임을 알기 때문이다. 죽으러 가는 것만이 사명이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것이 예수를 돌보는 사명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직되지 않은 충성을 지키는 자는 온유하다. 긍휼이 가득하다. 이웃에 대한 화평을 알고 있으며 희락의 근원이 교제에서 나옴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교제 가운데 상대방의 연약에 대한 오래 참음 또한 지켜간다. 그리고 그를 고치고 난 후에, 그가 온전해 진 후에, 그를 떠나는 절제도 잘 알고 있다. 충성된 자는 철저히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이웃을 위해 사는 자이다. 사랑에도 이기적이고 마귀적인 사랑이 있다. 나의 쾌락을 위해 상대방을 옆에 둔다면 그것은 마귀의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가 사랑한다면 그를 놓아주는 법도 잘 알고 있으며, 섬김의 대상이 온전해진 뒤에는 그를 떠나주는 법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그래서 순박하고 진실되며 그 속에 거짓된 세상적인 생각이나 지혜가 없다.

"내 목숨을 걸고서, 나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렵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3-24, 새번역)


유럽과 아프리카의 허브hub,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2009, 가을.
충성된 자는 이웃을 하나님과 연결해주는 허브hub이며 신부와 그리스도를 위해 뒤에서 돕는 우정어린 들러리이다. 충성된 자는 이웃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으며, 다만 그의 기쁨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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