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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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낫또같은 일, 스니커즈같은 놀이.

jo_nghyuk 2012. 11. 29. 16:17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시절 때 나에게 유일한 스트레스의 탈출구는 노래방이었다. 당시는 노래방에 청소년이 출입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쟁점이 중첩되던 시기였고, 나는 '단지 노래방에서 노래만 불렀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순박한 친구들과 함께 진술서를 쓴 적도 한번 있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일주일에 한번 가는 노래방은 그야말로 고함과 비명의 락뮤직과 멜랑꼴리한 소년적 감성의 발라드와 게토적 취향의 힙합뮤직의 장르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어느 보이밴드도 이렇게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커버하지는 못했으리라. 
셋리스트도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서, 다소 부드러운 소프트락으로 (라디오헤드의 2,3집과 콜드플레이, 킨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매우 달달하고 우울한 감성으로 시작하여 분위기가 고조되면 우리는 쾌활한 힙합 잼을 이루어 각 16마디 파트를 나누어 랩실력을 뽐내고는 했다. (바이오리듬으로 치면 조울증에 가까운 셋리스트였지만 당시 우리의 막중한 학업현실 때문이었으리라) 심지어 우리는 다년간의 숙련도와 같은 가사에 대한 물림현상으로 인해 프리스타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르게 되었다. 우리는 사회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그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육부가 아닌 "단지 썩은 사회" 였다. 뭐가 썩었는지도 명쾌하게 짚을 능력이 없는 작고 부드러운 뇌를 가진 5인방은 아무튼 "어른들이 배설해놓은 썩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랩으로 노래방의 low-fi한 음질의 mr 위를 수놓았다. 어떤 이는 각운을 맞추기도 했고, 어떤 이는 리듬 위를 탈선하기도 했으나 우리는 이러한 잼 세션이 마냥 행복했다. 
우리 중 하나는 김종국과 같이 여린 목소리와 3옥타브를 넘나드는 덩치 큰 아이가 있었고, 또 하나는 락과 힙합을 좋아하는 샤프하고 왜소한 친구가, 또 하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김광석과 힙합의 양극성을 오고가는 염세주의적이면서도 시인기질의 통통한 친구가, 다른 하나는 우울과 자폐의 달달한 멜랑꼴리 속에서 구석에 처박혀 라디오헤드만 부르는 조용하고 기괴한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나는 솔직히 노래방은 세명이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세명일 때라야, 간주 중이 나올때 노래를 끊는 일이 없이, 좋아하는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서가 돌아오는 타이밍도 세명이 가장 좋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네명이 함께 했고, 락과 발라드를 주로 부르던 3옥타브의 덩치 큰 친구는 김광석과 힙합을 오가는 통통한 친구가 함께 노래방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나는 그 간극 사이에 서서, 3옥타브의 친구와 함께 2.2옥타브까지 함께 했다가 추락하는가 하면, 김광석을 부르는 친구와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힙합의 각운으로 계단을 만들어 점점 경쾌하게 올라오고는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O형의 전형적인 사회성이 아닌가. 
우리는 참 많이도 노래방 스피커를 나가게 했다. 그것은 "학생이라는" 우리의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노래방 사장님의 슬픔이 되었다. 매달 스피커는 우리의 고함과 함성으로 "뻑났고" 우리는 아저씨가 보너스 1분을 넣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밀하게 선곡을 하여 부르고 싶은 모든 곡을 다 부르고는 했다. 
O형으로서 중재자를 자처하던 내가 대학 시절 염세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우리의 셋리스트는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라디오헤드의 Idioteque를 탬버린을 치며 부르기 시작했고, 에미넴 랩을 할 줄 알게 되었다. 멜랑꼴리한 친구는 여전히 달달한 소프트락을 혼자 불렀고, 통통한 친구는 김광석을 혼자 불렀고, 3옥타브는 혼자서 김종국을 2절까지 다 불렀다. 뭔가 노래방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온 것 같았다. 점점 우리는 스스로의 취향에 천착하게 되었고, 점점 남의 노래를 듣기 보다는, 내 순서 앞에 네명이 있는지, 2명으로 줄었는지, 어떤 썩을 녀석이 우선예약을 했는지만을 생각하며 자기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들이 십년이 지나서 직장인이 되고, 전도사가 되고, 대학원생이 되어서 한자리에 모인 일이 있다. 나는 별로 아는 노래가 없었다. 조용히 친구들과 옛적에 함께 울며 부르던 추억의 발라드를 선곡했다. 마이크를 돌려가며 부르자 어느덧 예전의 거기에 우리는 있었다. 15년 지난 한국힙합 뮤직을 선곡해서 함께 떼창을 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그곳에 함께 있었다.
마지막 보너스로 들어온 1분을 가지고 안재욱의 "친구"를 함께 서서 불렀을 때 30대 아저씨는 가고 10대 소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근래 몇년동안 노래방에 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어느덧 일주일에 7번 노래방을 찾던 고등학생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30대 아저씨가 된 지금, 나는 얼마나 창조적인 놀이를 하며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도서관에서 참으로 오랫만에 칙 코리아의 눈물방울같은 재즈피아노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삶이 담백함을 넘어서 뻑뻑한 양상을 띄게 되는 것을 그대는 경계하여야만 한다. 낫또와도 같은 삶을 다시 스니커즈와 같이 재배열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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