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두발 자전거와 세발 자전거는 함께 달린다.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두발 자전거와 세발 자전거는 함께 달린다.

jo_nghyuk 2012. 11. 30. 20:12

가장 온전하게 설 수록 가장 자유하다. 온전히 설 수록 더 많은 숨통이 트인다. 그리고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이다. 그러므로 엎어져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강압의 명령이 아니라 청유형으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서자. 그러나 타자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더 좋지 않을까?'라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참된 견책은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때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나 또한 그 죄의 파편을 뒤집어 쓰게 된다. 이것은 죽이는 문자, 정죄의 원리이다. 내가 깨끗하다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는 순간, 율법은 다시 나를 정죄한다. 내 눈에서 들보를 뺄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 후에 "밝히 볼 때만이" 우리는 충성된 친구로서 공동체의 지체의 죄를 책망해 줄 수 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이것을 해야 한다. 예언자적 선포의 때에만 우리는 통로로서 이 두렵고 떨리는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고,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값싼 은혜에 취해 남들과 같이 넓은 길을 찾는 것은 오히려 나를 나른하게 하는 나태의 죄이며 더 무겁고 고통스러운 죄와 죽음의 멍에를 지고 느리게 걸어가게 할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에 대하여 죽고, 제자로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발이 가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발 자전거는 오히려 더 느리다. 장성한 자의 발은 두발 자전거와 같아서 더욱 빠르게 순종의 길, 의의 길로 경주를 해 나간다. 그러나 여전히 타인에게 자신의 길을 자랑하지 말라. 자신의 길을 강요하지 말라. 그가 걸을 수 없는 연약함을 정죄하는 순간, 너 또한 (오히려 더더욱 작고 연약한, 아니 너는 그에 비하면 형편없는) 죄인임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네가 온전히 서고 달리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은혜 때문이지, 네가 강해서이기 때문도 아니요, 네가 잘해서이기 때문도 아닌, 오직 순종을 통해 약한 자에게 넘치게 주시는 강함의 은혜 때문인 것이다. 


너는 날마다 생명을 걸고 싸워라. 날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날마다 더 힘차게 경주하고 이기기를 힘쓰라. 그러나 쓰러진 자가 있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가라. 엄한 매를 가지고 나아가는 스승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동일하게 아파하는 부드러운 아비로서 나아가라. 이 세대에 가증한 스승은 많으나 참된 아비는 실로 적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깊은 도랑을 뛰어넘는 전면전과 백병전을 치루는 치열한 보병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쟁에서 상처입은 피해자들을 향한 부드러운 의무병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작은 자는 스스로에게는 의무병이며 타인에게는 보병이 되는 자이다. 예수의 말처럼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타인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이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스스로의 싸움에서는 온전히 서고 타인에게는 함께 아파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며, 참 제자직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맑은 소금은 녹아서 눈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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