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카이로스와 능력장, 개별자의 때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카이로스와 능력장, 개별자의 때

jo_nghyuk 2012. 12. 30. 00:36
거대한 역사 흐름 안의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있는가 하면, 개개인이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개별자로서의 개인의 삶의 주기에도 카이로스와 능력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지금은 은혜의 때이며,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 자유를 가지고 방종으로 내달리는 해프닝 또한 숱하게 벌어지고 있으나, 우리는 더 나은 성숙을 분명히 원하고 있고, 균형을 원한다. 그리고 이 균형에 대한 갈망은 자유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큰데, 그것은 인간이 무한한 영혼과 유한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며, 고체와 같은 육신 안에 항상 활동하는 활력으로서의 액체들이 끊임없이 생동하며 흐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태 안에 생동감이 담겨지는 것이 이 우주이다. 어떤 에너지이든, 그것은 질료를 통해서 운동이 현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접점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가능태와 현실태로서의 세계 속에서 영감을 주는 능력은 사랑이다. 생에 대한 사랑, 타자에 대한, 우주에 대한, 근원자에 대한 사랑이 모든 것을 활력있게 하는 능력이 된다. 창조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괴로움은 시인을 만드는데, 이 괴로움의 리듬은 광기에 가까운 심장의 리듬이다. 시의 미친 달리기를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산문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이 괴로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 갈망과 채워지지 않음의 간극 사이에 놓인 실존의 감각으로서 괴로움은 등장하게 된다. 모든 피조물은 이 괴로움의 상태에서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면, 사랑은 미래의 것임을 나타내는 힌트가 되기도 한다. 
식물에서부터, 동물까지, 자연에서부터, 우주까지, 그리고 사람까지 모든 피조물은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그 괴로움으로 인해 신음한다. 이들 모두는 갈망하고 있으며, 기다리고 있다. 기다린다는 것은 피조물됨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주체적인 것은 최고 근원자로서의 창조주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피조물성은 여기서 객체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들 모두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도상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이 오는 것을. 몰트만의 표현대로, 이 온다는 것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나의 표현으로 온다는 것은 여전히 위로부터 내려지는 주권적인 은혜일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미래로부터 오는 것은 "어쨋든" 온다는 확실성을 지니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나 실상은 "언제"라는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때는 알 수 없으며 피조물은 어쨋든 기다리는 도상 위에 놓여진 가녀린 실존의 양태를 띄고 사는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더 불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공간적인 개념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공간으로서의 능력장을 구해야 하고, 부여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구하는 자는 그것을 받을 줄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구하듯, 우리는 공간과 시간 안의 능력장을 구해야 한다. 관계의 화해를 위한 능력장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 "때"로서의 주권성은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미완료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두 질료는 계속해서 현실태에서 가능태를 향해 변화해간다. 우리가 이 피조물성을 어찌할 것인가?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아니 기다림 속에 들어있는 "참는다"는 개념과 함께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가장 영적인 것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된다. 가장 신앙적인 자세가 바로 이 참고, 희망하며, 기다린다는 자세라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빈 공간"이 따른다.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이 기다림을 참지 못함으로 우상이 들어오게 되고, 스스로를 만족시킬 중독의 대상이 들어오게 됨을 우리는 역사에서, 우리의 삶에서 본다. 빈 공간은 자꾸 채워지길 원한다. 우리 삶의 "비어있음"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피조물됨의 실존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만큼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나 자신을 잘 보게 하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은 그 빈 공간을 자꾸 채워넣고, 우겨넣는 강박증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불교는 이 끝에 다다랐다. 무라는 것의 정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기다려야 한다. 가장 낮고, 가장 외롭고, 가장 누추한, 가장 춥고, 가장 불확실한 그 장소에서 기다려야 한다. 
빈 곳은 자꾸 무엇으로 채워지려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꾸 그것을 비우려 하는 강박에 걸린다면,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꾸 무언가로 참지 못하고 채워넣는다면, 우리는 "받지" 못할 것이다. 의심은 빈 공간에 채워넣은 나의 사고체계이다. 예수의 손 구멍에 채워넣은 나의 손가락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 
그러므로, 그대로 놔두라. 나의 빈 공간에 무엇이 흘러들어오고, 나갈 것을 염려하지 말고, 제랄드 메이가 말하듯, 관상을 일상에서 훈련하며, 취득도, 상실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카르페 디엠, 지나친 내일의 기대나 염려나 모두 우리에게서 오늘을 앗아간다. 기다림은 분명히 미래를 향하고 있으나, "특정한 순간"을 예상하고 있지는 않다. "언젠가는 오겠지"라는 사고는 포기와 낙담의 친척이다. 
진정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을 충실하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다. 내게 주어진 사랑과, 내게 주어진 환경과, 내게 지금 주어진 갈망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그것을 안고, 그것을 내어주고, 그 흐름의 가운데에서 충실하고 성실하게 청지기적인 자세로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자족하며 감사하며 충성하는 사람이다. 

자, 보라. 그러므로 개개인의 삶에서, 개개인의 내부에서 그 카이로스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때는 "이미" 씨앗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으로 나는 접근해 들어가고 있다. 
청지기인 사람은 이미 그 씨앗을 땅에 심어 발아했을 것이다. 그 개별자는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심고, 자유를 거두고, 정직으로 심지를 삼고, 균형으로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성공하며, 그러면서도 숙명적인 고통을 안고 여전히 기다릴 것이다. 참되게 기다리는 사람은 참되게 오늘을 사는 사람이며, 오늘의 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다. 
카이로스를 내가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에게 그 시간과 공간이 "결코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시간도, 공간도, 질료도, 우리 삶의 피부조직조차 전부 유동적인 존재로서 유동적인 세계 속에 있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어쩌면 "고정된 한 점"으로서의 카이로스와 능력장으로서의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모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은 생동하는 영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를 가지고 그 성령 안에 참여하게 된다. 이
카이로스는 우리가 "준비되는 대로" 주어지기도 한다. 고정된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준비되는 대로" 
그것은 일년 후가 될지, 삼년 후가, 사년, 십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긴박성을 느끼고 오늘 하루를 시한부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마라토너가 오히려 더 빠르게 달리고 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온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는 그 오는 것에서 배제될 수 있다. 
균형을 잡지 않은 자가 자전거의 자유를 모르는 것처럼, 달리지 않는 자전거는 온전히 설 수 없는 것처럼, 자유의 카이로스 또한 정직과 균형을 통해 온전히 역사한다. 
이 시대에 자유와 은혜는 이미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역사케 하는 것은 정직이다. 
하나님을 찾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은 그것을 이미 선취하고, 이루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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