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예수님의 단순성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예수님의 단순성

jo_nghyuk 2009. 1. 31. 12:26
요한복음 8:52~59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들린 것을 알겠소.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든지 나의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은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은 너희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만일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볼 것을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는 그 날을 보았고 기뻐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피해 성전 뜰을 빠져 나가셨습니다.

"I tell you the truth,"  Jesus answered,"before Abraham was born, I am!" At this, they picked up stones to stone hi,, but Jesus hid himself, slipping away from the temple grounds.




오늘 묵상한 구절. 나는 마음 한 켠이 찡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순결한 영성 때문이었다. 순전한 단순성. 세상 관점으로 본다면 무식할 정도로 깔끔한 단순성에 나는 의아함과 동시에 놀람을 느꼈다. 왜 예수님은 '공교하게' 세상에 등장하시지 않는가, 왜 사람들이 그를 비웃도록 그다지도 '단순하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심오한 발언을 어떻게 아무런 논리적인 장치 혹은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 없이 이다지도 심플하게 말씀해버리고 끝낼 수 있는것인가. 내 인간적인 생각에는 그는 모든 수사법을 동원하여야 할 것이다. 비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 당시 지식의 으뜸을 자랑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상을 모두 인용하고 활용하면서 그 지식의 최고점에 도달하여 그들의 지식체계를 놀랍게 뒤집어 엎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단순히 그분은 말씀하셨다. "I tell you the truth",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시작점은 흔들리지 않게 진리에 고정되어 있고 여기서 말씀은 출발한다. 이전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거짓말장이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진리의 아버지다."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은 너희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만일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확실히 안다고 말씀하셨다. 굳이 돌려서 모호하게 말씀할 필요가 없으셨고 모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단호하셨으며 단순하게 말씀할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진리에서 출발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어째서 우리는 '공교함'에 의존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두가지 경우가 먼저 생각나는데, 첫번째는 거짓말을 참말처럼 해야 할 때의 장치로서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참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에게 날 것 그대로 먹일 수 없을 때, 사실은 그의 반응이 두려워서 적당히 조리해서 가져가야만 하는 모호성이 필요할 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후자의 경우가 많다. 나는 사람에게 진리를 신선한 날 것 그대로 가져다 주지 못했었다. 왜 나는 예수님처럼 단호한 언어의 칼로 손질한 진리의 생선을 자신있게 상대방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못하고 그것을 자꾸 조리하며 양념으로 교묘하게 진리를 가려서 (마치 어머니가 달콤한 케익 속에 알약을 은밀히 삽입해넣어 아이에게 케익과 약을 함께 먹이는 방법처럼)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방법을 취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전략'이라고 불러왔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타협으로의 '전락'이 아니었을까.

물론, 사람들과 communicating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언어를 사람들이 '먹을만한' 것으로 바꾸어주는 행위는 내가 그들을 존중해주고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치우치면 위험하듯이 그들을 '생각해주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서 그들을 '눈치보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예수님처럼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케익만 먹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케익 속에 알약을 그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단호함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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