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Invitation of the cross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Invitation of the cross

jo_nghyuk 2013. 2. 5. 23:41
십자가는 선택하는 것이다. 넓은 길 가운데서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는 기점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성별된 고통이다. 그러나 사실 십자가의 길은 초대에 가깝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탁자에 놓여있는 부담의 초대장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불편한 순례를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따르는 것이다. 불편한 제자의 길을 따르는 것.
그러나 온전히 항복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예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길에 있어 제약이 될 것이고 약함이 될 것이다. 약함과 장애,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기 부인. 진정 자기 부인은 노력이 아니라 항복에서 시작된다. 성령이 자유케 하실 때 순종하는 것도, 나를 매실 때 순종하는 것도, 그 양극을 로프반동할 수 밖에 없는 숙명적인 나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도 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나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계획한 나의 참된 모습이다. 십자가에 박혀 있는 것은 나의 옛 자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박히고 함께 멍에를 메고 함께 움직인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고 육신은 무겁다. 새 자아가 된 이후에도 우리는 예수와 함께 이 옛 자아와 투쟁한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정욕과 탐심이 못박히는 것이며 누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죽이는 것. 이것은 항복의 의미이다. 항복해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항복인가? 어떻게 항복할 수 있는가? 나의 내려놓으려는 의지로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무의식 안에서는 내려놓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위선과 가식의 종교생활의 멍에로 괴로워한다. 예수의 멍에는 먼저 십자가에 내 자아가 철저히 못박히는 항복을 요구한다. 나의 뜻, 계획, 기대, 바램, 고집, 성취, 상황, 타인들의 반응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항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전반에 대한 핸들을 놓는 것이다. 나의 노력 조차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 놓아버린다는 것이 나태한 포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은 초장에 눕는 것이다. 힘을 빼는 것이다.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기는 비참함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파라다이스의 초장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온상인 세상 가운데로, 예수와 함께, 그와 멍에를 메고,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십자가를 지고, 오직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원하는 방종에 가까운 자유로 보이는가? 너의 뜻대로 모든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자유의 개념은 계속해서 차연differance의 과정에 있다. 모든 것에 대한 자유가 주어지고, 덕을 세우고, 타인을 섬기는 사랑으로서의 참 자유로 자유의 개념은 옮겨간다. 시간의 트랙을 따라서. 
항복은, 상황의 변화, 멍에의 방향에 대해 유연하다는 것이다. 멍에가 멈추면, 너도 멈춘다. 이때는 움직이는 것이 고통이 될 뿐이다. 멍에가 가면, 너도 간다. 이때는 고집을 피우며 가만 있는 것이 고통이 될 뿐이다. 함께 움직이는 대로 가면, 고통이 아니라 자유가 온다. 
"그러나 이 변화의 기점에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데, 그것은 관성 때문이다. 멈춰 있으려는 이의 관성이 가려는 예수의 멍에와 충돌을 일으킨다. 더 가고 싶은 이의 관성이 멈추는 예수의 멍에와 충돌을 일으킨다"
모든 변화의 기점에서, 고집을 부릴수록, 고통의 광야, 고통의 정류장의 시간이 길어져 간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죽음을 감수하면, 그 갈등과, 그 고통은 길지 않다. 함께 보조를 맞추는 순간, 고통이 사라지고, 치유가 온다. 고통이 계속되어도, 그 멍에는 겉사람을 죽이고 속사람을 견고하게 하는 치유다. 가난하더라도 회복이 온다. 슬픔 중에서도 기쁨이 온다. 가난이 지속되고, 고독이 지속되도,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속되고, 이 고통이 지속되도, 그분과 함께 걷는다면, 너는 하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멍에를 메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고,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어야 한다. 네 영이 날아오를 때도, 너는 두 발을 땅에 딛는 송아지와 같다. 모든 바다는 경계를 만나며, 모든 자유는 빗장이 있기에 혼돈이 아닌 바다가 되고 방종이 아닌 자유가 된다."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 고통의 멍에를 자의로 벗으려 하지 말고, 물어보라. 이 잔을 내게서 옮기길 원하시나이까? 그렇지 않다면,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올 때, 자유의 해방을 타의에 의해 결정권을 넘기지 말고, 물어보라. 세 번까지 물어보라. 하나님이 정하게 하신 것을 내가 부정하다 하는 것입니까?
이 전환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실로 깨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야 함을 인정하라. 그것이 항복이다. 
마음으로부터 항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처음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상태를 가지고,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내면과 외부와 관계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심령의 완악함을 끊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언제나 예배하고, 기쁘시게 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예배하고, 너를 기쁘게 하는 길에 접어들어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분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멍에를 지는, 내 육체 안에서, 이 세상 가운데서 그분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인천 공항에서, 2012 여름, 십자가와 departure 혹은 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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