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사순절 첫날 새벽기도 말씀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사순절 첫날 새벽기도 말씀

jo_nghyuk 2013. 2. 14. 01:02
어제,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저에게도 사순절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순절, 하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이며 고난입니다. 오늘 성경 로마서 15:8에서 말하듯 예수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할례의 추종자라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힘입어서, 우리는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새 사람을 입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우리에게는 어떤 긴장의식이 생겨납니다. 고난. 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우리를 예수의 고난으로 초청하는 긴장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르게 구별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은 우리가 겪는 고난에 집중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작지만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내가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시작, 재의 수요일의 시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어떤 의지력을 동원해도, 결코 죄를 대항해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항복할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에 항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나는 죄를 사랑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와 나를 같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보시는 것이고, 우리를 죄가 없는 예수를 통해 보시므로, 원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보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비참한 죄의 피조물로 드러날 뿐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현재를 상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상상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이방인이고, 유대인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죄에 대해 어찌할 바가 없이 그냥 살다 죽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비로소 이방인이고,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 구속은, 거저 주어졌지만,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거셔야 했습니다. 하나님도 모든 것을 거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하나 뿐인 아들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외침만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단 한 명 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버림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 이 단순한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아니 더 나아가, 오히려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는 대목이 복음서에 가득합니다. 영광이 아니라 수치를 받으시고,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점점 잃기 쉬운 것이 겸손인 것 같습니다. 고난은 예수께서 받으시고, 대속은 예수께서 하셨는데,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였는데, 어느덧 우리는 이 은혜에서 출발하였다가 엄격한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겸손함은 사라지고, 나의 의로움과 강함이 드러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순절을 지킨다, 라는 의식이 강해지면, 예수의 고난에 대한 죄인의 감사보다, 예수를 위해 내가 받는 고난의 의로움이 커지는 위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로부터 출발하였지만, 결국에는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잘 믿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의 나뉘어지는 문제의 개념으로 확장되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것이지,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강한 것은 공로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의 문제를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사순절을 대할 때, 나는 여전히 처음 예수를 믿었던 그 가난한 심령, 사랑받을 자격 없는 죄인, 그럼에도 사랑을 받는 그 놀라움의 심령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신앙 생활을 잘하고, 헌신되고, 충성된 종으로 "이제는 강해지고, 이제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주 앞에 서시려고 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말하면, 후자의 마음, 교만한 마음, 자기 의로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쁨도, 사랑의 감격도, 긍휼도 없었습니다. 자발적인 기쁨의 순종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의, 도덕적 책임의 복종이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 높아지고, 교만하며, 동시에 두려움에 찬 신앙생활의 마음으로 저는 사순절 고난을 "치루려고" 하였습니다. 

4절을 보면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믿음이 강한 자에게 접근하는 것과 약한 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다름을 보여줍니다. 지각이 장성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에게는, 인내로 소망을 바라며 달리게 하시고, 아직 연약하여 힘이 없는 이에게는 성경의 위로로 두려워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인내"로 소망을 성취하고 계십니까? "위로"로 성취하고 계십니까?
사실, 이 인내와 위로는 강한 자, 약한 자를 구분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인내와 위로가 번갈아가면서 적절한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하고 격려를 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순절의 시작이, 인내와 위로가 함께 있는 출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내만을 고집하다가 두려움의 율법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위로만을 찾다가 나태한 방종에 빠지지도 않는, 균형잡힌 신앙의 여정의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여정이란 계속해서 처음 왔던 길로 돌아오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는 부메랑과 같이 보입니다. 은혜로 출발하지만, 우리는 성화의 길을 따라가며 점점 충성에서 엄격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다시 은혜로 돌아옵니다. 
때로는 은혜를 앞서가며 나 자신의 욕심과 은혜를 구분 못하고 헤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앞의 정절과 충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서, 우리는 참으로 자주 양 극단을 헤매는 여정을 겪습니다. 

그것은 인내와 위로를 통합하지 않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내할 수 있게 하시는 힘을 주시는 것도 은혜요, 위로받을 수 있게 힘을 빼시는 것도  은혜인데 자꾸 나의 힘으로, 나의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우리는 인내와 위로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인내로 또는 위로로 라는 말이 5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 보십시오.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라는 말로 통합됩니디.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내와 위로는 통합됩니다. 은혜와 행위는 통합됩니다. 강함과 약함도 통합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도 통합됩니다. 잘 믿는 자와 믿음이 약한 자도 통합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고 부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아 예수의 고난을 먼저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고난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참여는 나의 수행을 위한 고난의 참여가 아닙니다. 이 참여는 예수께서 먼저 보이신 본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웃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내 영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15장은 우상 제물을 자유하게 먹는 믿음 좋은 이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자유를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데에 쓰지 마십시오. 다만, 이웃을 기쁘게 하는 데에 쓰십시오. 
3절이서는 예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심을 그 근거로 드러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고난은, 이웃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줄이고, 이웃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참된 고난의 참여의 의미이고,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이웃의 기쁨을 위해 어떤 손해를 감수하시겠습니까? 어떤 자유를 절제하시겠습니까? 어떤 기쁨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희생과 포기는 "나의 영성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듯, 이웃을 위한 것이고, 다른 소외된 모든 이방인들과 같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내가 포기하는 만큼, 약한 이는 더 얻게 됩니다. 이렇게 균등하여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셔서, 약속이 비로소 성취되어, 이방인들이 긍휼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0절의 말씀처럼 열방이 유대인들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었다 라는 은혜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소외되었던 모든 이들이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은 소망의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은 그저 고통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장차 올 은혜의 소망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3절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기쁨과 평강"이 이 시간에 충만해야 합니다. 사순절을 의무와 책임으로서 무거운 종교의식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셔야만, 고난의 의미를 기쁨과 평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이, 평강이 없이 우리는 고난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기쁨과 평강 되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이 사순절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고난은 소망이 있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과 함께 연합하여 소망을 가지고 예수의 구원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이가 믿는 이와 함께 하며 함께 예수를 믿고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고난은 오로지, 내 기쁨이 아니라, 이웃의 기쁨을 위한 고난입니다. 연합을 위한 고난이고, 예수를 나타내기 위한,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과 평강으로 감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사순절이 무거운 종교 의식이 아니라, 기쁨과 평강이 가득하고, 소망이 넘치는, 이웃을 위한 나눔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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