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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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베드로의 재부팅

jo_nghyuk 2013. 3. 23. 16:31
예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번아웃된 베드로에게 회복시키신 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아마도 충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을 먼저 회복시키신다. 베드로의 연약과 상관없이 (더 강함이 더 사랑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예수님은 일깨우셨다.  그 사랑은 베드로의 안에 있었다. 충성의 실패와 함께 그 사랑은 어두컴컴한 동굴 가운데로 숨어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과 자격을 동일한 위치에 놓으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자격없는 자를 그 위치에서부터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포옹해오신다. 그리고 그에게 애초에 힘이 없었음을 주지시킨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없음으로, 능력이 없음으로, 의지가 약함으로 우리가 그를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우리의 사랑을 일깨우신다. 내가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의지가 없어서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던 우리의 사고를 뒤흔들어 놓으신다. 사랑은 그저 받는 것이다. 사랑은 그저 주는 것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가장 빠른 경주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가장 느린 자에게 먼저 열려 있는 곳이다. 어쩌면 가장 느린 사람이 겸손하게 먼저 도착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기 이전에 달리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자꾸만 소진되어 감에 따라 우리는 의지와 사랑을 동일시하고 (사랑과 의지가 아니라) 우리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가장 진리에 속한 말이긴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랑받을 자격 없는 나에게 저편에서부터 돌진해 들어오는 무한한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랑은 다시 조용하게, 우리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그리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하고, 사랑하도록 죽었다. 나는 너에게 세번 물어본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요청을 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는 사랑에 관련된 것이다. 먼저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과 (우리가 그를 세번 부인하는 철저성에 대해 그는 세번 우리를 긍정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세번 부인하고 그는 우리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각각 세번씩 반복된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했던 의지가 점차 사랑으로 강해짐을 볼 것이다. 부족했던 충성의 열매가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으로만 여물어가는 것을 점차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점차 라고 표현했다. 내적 열매인 성화는 시간을 따라, 경건의 연습을 따라, 친밀함의 동화의 여정을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절대로 한번의 올곧은 충성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 죽음을 각오한 진솔한 충성의 결단이, 내적 열매 없이 얼마나 부질없이 스러져가는가를 경험하였다.) 
그 여정은 생각보다 느릴수도 있다. 다른 이가 나를 보기에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길 외에는 없다. 더 사랑하는 것만이 더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다. 충성하기 위해 분투를 위한 분투가 되는 것도 부질없다. 의지를 위한 의지가 되는 모든 것, 아니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이 되기 위한 의지"는 모두 부질없다. 

사랑이 의지가 되어야 한다. 애초부터 모든 생명의 힘의 근원은 사랑에 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기적적인 에너지가 샘솟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사랑하기 위해" 에너지를 쥐어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저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우주적이고, 신비하고, 영적이고,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사랑이 있는 곳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역사하는 시작지점은 사랑이다. 이곳에서부터 모든 생명의 힘이 방출될 것이다. 이 모든 열매의 근저에는 사랑이라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 어떤 열매도 사랑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이 그 열매 없이 온전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온전함의 목적을 위해 사랑으로 자라난다. 온전하지 못한 자들이 성령으로, 사랑으로 온전한 가운데로 자라난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굳게 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공간과 에너지를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게 될 때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함께 성화되고 함께 한 몸으로 온전하여 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지,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출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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