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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패된 원두로부터

jo_nghyuk 2015. 11. 11. 12:23

최근에 아침에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서 출근해서 마시고 있는데, 일주일 전부터 아메리카노에서 산패된 원두 맛이 나고 있다. 로스팅한지 기간이 많이 지났나 보다. 사실 싼 맛에 알면서도 마시고 있지만, 산패된 원두를 2500원에 마시는 것은 그다지 싼 가격은 아닌 것 같다. 

일전에 네덜란드 제베나르에 갔을 때, 나는 친구에게 '더치커피'가 있냐고 물었다. 친구가 준 것은 '한국의' 더치커피가 아니라 그냥 Dutch에서 파는 커피였다.(네덜란드에서 커피가 날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 커피는 분쇄된 상태로 300그람정도 포장되어 판매되는 커피였다. 

그런데 지금 카페에서 사 마시는 모닝 아메리카노가 그 맛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커피를 맛으로가 아니라 추억으로 마시는 중이다.공교롭게도 '산패된' 맛이 추억을 불러일으키다니.

원두의 산패는 존재자의 비존재성이다. 모든 존재자가 가진 무성과도 같다. 산패된 원두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무성이 강한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나 보다) 

누군가는 산패된 원두도 즐기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라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원천이고, 삶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에너지 파장을 지니고 있어서, 산패된 원두로도 얼마든지 나는 제베나르의 그 테이블 앞에 앉아 있기도 하고, 아른헴의 숲 속을 걷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자족함에는 근원적 힘이 있고, 향에는 회상erinnern을 통해 현재로 과거의 경험했던 현상의 구조를 일부 가져오는 힘이 있다. 

다만, 산패된 것은 산패된 것이고 신선한 것은 신선한 것이다. 산패된 것이 시간 계열상 신선한 것을 앞지를 수는 없다. 생명은 그래서 언제나 새롭고, 빛은 언제나 새 것이다. '새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질성 자체에서 오는가, 그렇지 않고 '존재의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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