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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끽에 대해서

jo_nghyuk 2017. 2. 18. 18:08


“우리 존재를 만드는 것은 우리 존재 자신이다. 우리는 숨 쉬기 위해 숨 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책한다. 이 모든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삶이다. 삶은 하나의 솔직성이다.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과 반대되는 그런 것으로서의 세계, 그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거주하고, 산책하고, 점심과 저녁을 먹고, 누구를 방문하고, 학교에 가고, 토론하고, 체험하고, 탐구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그런 세계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70. 

최근 새삼스레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왜 밥을 먹고, 왜 사람을 만나고, 왜 숨을 쉬는가. 생각해보면 그건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비판할 때, 그의 ‘도구적’ 세계관, 즉 ‘무엇을 하기 위한’, 세계 자체가 아니라 세계 바깥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무엇에 매여 있는 사고를 겨냥하여 비판하는 그 사격범위에서 나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칼 바르트는 기존의 기독교 전통이 구원론에 있어서 의롭게 하는 칭의와 거룩하게 하는 성화 이외에, 신자를 부르는 소명을 추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소명은 단순히 제사장, 예언자, 왕의 삼중직 뿐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욕망으로서의 지향을 가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을 향할테지만,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전개와 내뻗음으로서의 지향임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신을 향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향하는데, 기독교 전통은 전자만을 강조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계몽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이 지향작용을 어디까지 뻗고 어디까지 멈출 줄을 몰라서,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세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가르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자랑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더 잘 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이 때 책은 철저히 도구적 존재자이다. 

그러나 만약에 책 자체를 사랑해서 책 읽는 것 자체를 위해 책을 읽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 산책하는 것 자체를 위해 산책하고,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위해 글을 쓰는 그 사람은 행복하다. 페이스북에서 잘 쓰여진 글에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을수록, 어느새 글 자체를 즐거워하기 보다 ‘좋아요’를 받는 상태를 즐거워하게 되는 것과 같은 모양새를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하이데거가 비판한 퇴락Verfallen해버린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불교적 가르침 중에 배울 만한 것은, 현상학적으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에서’ 만족함을 얻을 수 있음의 겸손한 기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현재가 미래의 염려나,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해주고, 현재 자체를 만끽할 수 있게 한다. (물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현상학적 현재의 만끽은 동시대적 공동체의 문제나 다음 세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아론적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 어쩌면 그게 현상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 한계는 레비나스까지도 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바퀴 돌아서, 세계 자체를 위한 세계, 현재를 즐거워할 수 있음이, 오히려 바르트가 새로이 강조한 ‘부르심'(소명)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부름 받아 빛으로, 실재계로 나아온다. 기존의 사고는 무엇을 행하기 위해서, 라는 도구적인 소명만을 고려하였지만, 사실 우리가 놓친 또 한가지 측면은 부르심의 사랑 가운데 기뻐하고 자유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피조물을 자녀처럼 사랑하셔서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신 아버지이시다. 문제는 그 사랑을 나에게만 적용하고, 공동체나 이웃,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적용하고 나누지 않는 우리의 이기심의 문제이다. 바르트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그것은 기만의 문제이고, ‘작은 자아’에의 구부러짐의 문제이다. 나를 지나치게 붙드는 것을 놓으면, 같이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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