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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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jo_nghyuk 2017. 2. 18. 18:12

(2016.1.13)

나는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젊다 못해 어리숙한 시절에는, 복합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듯 하다. 그래서 산이나 꽃을, 노을을 보고 아 예쁘다, 하고 곧 고개를 돌리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들이 본 것은 무엇인가. 저들은 산이나 꽃이나 노을의 색감의 오묘함에 대해 왜 탐구해 들어가지 않는가. 천착. 나의 어리숙한 시절에 나는 모든 실재하는 것들에 유착하기를 기뻐했다. 큰 방향성 같은 것은 없었고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몰이치는 물결과도 같은 삶이었다. 즐거워 하는 것을 좇았고,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해가 지나면서, 살아 있다는 것이 대수롭게 여겨지고, 오히려 많은 질문들이 머리에서 돋아난다. 사람은 왜 사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개인의 행위와 사회의 사건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생전에 아버지께서 자기 손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습관적인 행동을 하셨는데, 그게 이제는 이해가 간다.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손등에 솟아난 푸른 핏줄과 주름들, 마디들을 이리 저리 살피고 움직여 보면서 살아 있다는 것에 경탄해 마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아이처럼 탐구하다 가셨다. 세상에 소풍 나온 아이처럼. 

어리숙할 때에는 좋아하지 않던, 차라리 모멸하던 단순성이 이제는 왜 이다지도 위대하게 보이는 것일까. 단순성의 큰 그림, 단순성의 큰 획은 자잘한 감정의 동요와 미혹하는 산만한 주위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오롯이 걸어간다. 나는 오롯이, 라는 표현을 자신 있게 쓰기 어려운 사람이며 차라리 지긋하게, 라는 다소 처연한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신의 동력이 없이는 너무도 힘겨운 사람이고, 마치 클러치 페달을 통해 차체에 동력을 제공하듯이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하루 사는 것도 버거워서 쩔쩔 매는 사람이다. 그러한 약점이 나를 신을 지향하는 신학을 하게 만들고, 인간을 지향하는 철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지인 하나는 자신이 먹는 쌀밥 하나에도 몸 둘 바를 모르고, 하늘의 구름과 저무는 해에도 소스라쳐 놀란다. 그러한 예민성이 그로 하여금 예술적 감수성을 갖게도 하고, 살아가기 버겁게 만들기도 하겠지. 그래도 나와의 공통점은, 연약한 몸뚱아리의 클러치 페달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은혜와 사랑의 공급으로, 평화와 기쁨의 동력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리라. 

다소 보수적이고, 비극적인 환경에서 자란 나는 ‘살아가는 것’의 기쁨을 잘 알지 못했다. 살아 있음 자체가 내게는 고통이었고 버거웠고, 그래서 타자와 공유할 만한 환경세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근에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는데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가재도구와 의복에 자신의 손과 발과 지체들이 새겨져 있는 그림을 보았다. 마치 하이데거가 인간 주변 세계를 도구적 공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 화가 주위의 모든 도구들은 그 자신 자아의 도구성으로 밤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그의 자아 이상의 것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의 책을 우연찮게 손에 넣어서 읽고 있는데 읽을수록, 사람은 왜 사는가. 예수는 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남겼는가를 자꾸 곱씹어보게 된다. 하이쿠를 쓰던 시인들이나 승려들은 덧없음의 세계를 그저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며 현재를 누렸다는데, 그렇게 텅 빈 실재계를 살기엔 창조주의 목적이 너무 허술한 것이 아닌가. 삶이라는 것은 관념의 실재화도 아니고, 실재성으로만 꽉 찬 지상적 삶도 아니다. 허망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짧고, 그렇기에 ‘길’을 발견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소명과 비전을 발견하지 않으면 큰 그림이 아니라 자잘한 낙서만 그리다가 시간을 다 보낼지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살아가는 중이고,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허망함과 덧없음에 갇혀 몇 주를 보내고 난 후에, 선불교적인 공 사상은 창조주와 피조된 인간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허망한 실재계가 아니며, 진리는 관념 속에 있지 않고, 탐구의 대상이지만, 우리가 손을 뻗는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보물이며,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다 거기에 걸고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무엇임에 확실하다. 그래서 신을 만나 놓고도 완전히 제자로 사로잡히지 못하고, 예수의 뒤를 좇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만큼 불쌍한 인생도 없는 것이다. 한 발은 자신의 과거에, 한 발은 신앙의 현재에 걸치고 있지만, 그에게는 다가오는 희망의 미래가 없고, 어둠 속에서 더듬어 나갈 뿐인 것이다. 

세상은 빛 가운데 창조되었고, 신성에 의해 강하게 붙들려 있고, 그로 인해 활력을 얻는다. 그렇기에 세상은 덧없지 않고 견고하다. 창조주를 믿는 관점에서 세상은 견고하고 희망이 있으며, 사랑으로 세워져 간다. 창조주를 믿지 못하는 관점에서 세상은 덧없고, 과거의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간다. 이 관점에서 무슨 큰 그림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인간의 짧고 처연한 지향성의 가지 밖에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를 즐거워하며, 그를 두려워하고, 높이며, 그와의 동행 가운데 인생의 흐름을, 지향성을 맞추어 사는 것이다. 큰 그림은 내 손이 아니라 그분의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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