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익어간다는 것의 분사형 - 28.09.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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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간다는 것의 분사형 - 28.09.2017

jo_nghyuk 2018. 4. 17. 02:50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듯이 산도 빨갛게 익는다.
성숙Reifen이라고 하는, 무르익음을 위해서는 시간이 소요된다. 봄에, 여름에 보았던 집 앞의 사과나무의 열매들이 가을이 되어서야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본다. 참 느리다.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본 나로서는 참 느리다, 답답하다, 도대체 언제?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에 온지도 꽉 찬 8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교회교의학의 시간론을 반절을 읽은 것과, 오블라우의 책을 반절을 읽은 것, 박사논문의 윤곽을 반절 정도 잡은 것, 어학원을 반절 정도 마친 것 등이 있고, 기도가 무르익기 시작한 것, 책들을 읽어가는 것, 자전거를 두 손을 놓고 타기 시작한 것, 커피를 마시는 무수한 날들과, 여행을 하며 겨울의 암스테르담의 보도블럭과 봄의 프라하의 풍광, 여름의 북해에 발을 담근 것 등이 있다. 다음 주에는 하이델베르크의 단풍을 보게 될 것이고, 11월에는 브래드 멜다우의 연주를 듣게 될 것이다.
나는 무르익은 뻐얼건 사과 한 알과 하이델베르크의 설레도록 붉은 산자락만을 위해 달려왔는가? 아니다, 그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어쩌면 논문 그것만을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아내와 여행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함께 만들어 먹고, 지인과 신학적 토론을 기차에서 트램으로 옮겨다면서도 유지하고,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소리쳐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고, 자전거를 손 놓고 타보기도 하고, 침대 맡에 놓인 책들을 읽어내려가고, 에스프레소를 내려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실수들로 마음을 졸여보기도 하고, 명상을 해보고, ‘보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독일어로 릴케를 ‘듣기’도 하고, 신발끈이 수차례 풀리는 것을 발견하고, 자주 아파서 침상에 누워 있기도 하는 이 모든 것들을 과거의 내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나는 ‘논문’ 하나를 생각하고 2월의 베를린에 도착했으며, 시작부터 많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겪으며 사람의 미래지향이라고 하는 폭의 넓이가 얼마나 무의미하며 짧기만 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해왔던 것이다.
정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나의 연약 속에서 나를 채근하고, 다그치는 일과, 조금 더 시야를 넓혀서 느린 속도로 길을 걸어가는 여정이 그려보이는 싱그러운 진폭 자체를 즐기는 일 사이에, 어떤 일이 더 현재를 빼앗기지 않고 살아내는 길일까? 어려움과 부딪혀 이겨보고, 때로는 우회로를 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오솔길’들이 인생에는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붉은 사과 열매 한 방울과 붉은 하이델베르크의 단풍 한 조각만을 위해 달려간다면, 그건 정말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 삶은 ‘죽어가는’, ‘목표를 향해 내지르는’ 도구이성적인 시간의 채근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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