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꽉 찬 나날들, 헐거워진 삶 - 24.10.2017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꽉 찬 나날들, 헐거워진 삶 - 24.10.2017

jo_nghyuk 2018. 4. 17. 02:51

요즘은 꽉 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보통 6시나 6시 30분 정도에 일어나서, 빵과 커피를 먹고 독일 초등학생들로 가득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해서 라틴어 수업이나 독일어 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와서 칼 바르트를 읽거나, 라틴어 공부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수업에 들어가든지 논문을 준비하든지 하는 일과가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는 일과는 거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어떤 일을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게 된다는 것. 그 동일성의 지속이 삶의 리듬이 되어간다는 것은 경외감과 감사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시편의 Hörbuch를 듣거나, Lutherbibel을 읽거나, 재즈를 듣는다던지 하는 시간은 참으로 깊고 맑다. 모든 숭고한 도시는 깊은 겨드랑이를 소유하고 있다. 역사가 깊어지고, 그 역사의 지층이 잘 보존되고, 후대 사람들이 그 역사의 줄기에 잇대어져 사는 도시는 부드러운 능선과 깊은 호흡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날이 갈수록 지혜와 힘이 자라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부드러운 리듬과 깊은 숨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침범의 위협 가운데 놓여져 있는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것을 잘 지켜내면서도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모두 필요하며, 또 그것들이 잘 수양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를 지키고 제어할 수 있어야, 타자도 보호해줄 수 있다. 희생하려면 바르게 희생해야지, 귀한 것을 진창에 던지는 행위는 어리숙한 감정적 기획에 다름 아니다. 

자기 전에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나 로마서, 혹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는 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참회하다가, 문득 그 참회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의 능력에 감탄하며 옆길로 새는데, 거기서 인류사에서 참으로 중대한 시간론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수기를 기록하는 것도 기억의 창고에서 내 안에 각인된 영상과 음성들, 행위와 사건들을 꺼내올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들을 꺼내올 때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지성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구상력에 대한 칸트와 하이데거의 논의를 후에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다)

또는 관상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하고, 독일어로 된 원피스 만화책을 읽기도 한다. 최근에는 게임을 하지 않고 있는데, 큰 결단이 필요했다. 덕분에 나는 저녁시간과 주말시간의 여백을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잔잔한 평온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얻으면 잃는 것이 있지만,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더 큰 무언가를 얻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드롱기 커피머신은 매일 즐겁게 사용하고 있다. 스팀밀크를 만들고 스팀기를 청소할 만한 바지런함이 없어서 그저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고 있지만, 그것으로도 꽤나 즐겁다. 아주 가끔은 라떼를 만들기도 하는데, 가끔이면 충분한 듯 하다. 그러게 어떤 일이든 더 가지려고 염려할 필요도 없고, 부족하다고 해서 불만족스러움을 품고 있을 필요도 없다. 화가 난다고 내 안에 고여놓을 필요도 없고, 즐겁다고 더, 더, 를 외칠 필요도 없다. 그저 적당하게 순간 순간 모든 것이 잘 주어져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물론 어떤 것들을 간구해야 하는 때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래서 그날의 먹을 것을 기도하고, 그날의 지혜와 힘을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피조성이다)

라틴어 사전이 무거워서 힘들었는데, 도서관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Pons 사전이 꽂혀 있다. 저런 것을 내 삶에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내 수중에 들어와야 평안한 게 아니라, 잘 사용해야 즐거운 것이다.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은 자신의 식료품을 집이 아니라 마트에 보관한다지 않던가. 

딱히 이러한 수기를 쓰는 것은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그냥 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이것을 읽고 즐거워하면 또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며칠 후, 몇달 후, 몇년 뒤 우연히 지금의 글을 읽는 나만이 내 수기의 독자가 된다고 해도, 그것 나름으로 참 즐거울 것 같다. 어째 독일 시골에 와 살면서 내 몸의 나사들이 자꾸 헐거워지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 느낌이 참 즐거운 것이다, 허허허.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