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 05.02.2018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 05.02.2018

jo_nghyuk 2018. 4. 17. 02:52

바이마르에 어제 다녀왔다. Haltestelle에서 목사님께 최근 일주일간 밤에 대여섯 번은 자다 깬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내가 어딘가에 매여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자유한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때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현실성을 누리는 사람, 더 능동적으로는 자유의 현실성을 부리는 사람이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잠이 다시 잘 오고, 자유하다고 생각하면 그 문제는 언제나 나를 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 이전에 이미 내가 그것을 넘어서고 있음을 누려야 한다. 현실도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창출해내는 삶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다시 예나에 돌아왔는데, 일찍 잠에 들었다. 이른 새벽에 한번 깬 것 말고는, 아침까지 오랫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다시금 깨달은 것이, 매인 사람 옆에 가면 같이 매이고, 풀린 사람 옆에 가면 같이 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왜 꼭 매인 사람 옆에서 내가 매여야 하는가? 내가 그 사람을 풀어줄 수는 없는가? 물론 그 과정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느낀 것은, 그것도 개개인의 신념체계를 통해 작동하는 ‘스스로의 자유’에 달려 있어서, 풀어주고 싶어도 계속 스스로를 옭아매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수업 준비를 하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수업의 효율성이 역으로 매우 좋은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Sosein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고,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사고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반면에 스스로의 개성은 꽃을 피고 있었고, 다소 엉뚱한 면모에 대해서도 타인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 그대로 존재하면 좋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개성과 방향성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을 살리는 방향성은 분명 존재한다. 개성을 죽이는 방향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고, 시간의 효율성을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으며, 휴식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능선을 가진 그래프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무턱대로 달리게만 하고, 채찍질하며, 압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방향성이야말로 가진 것의 최대치, 아니 가진 것을 다소간 활용하는 풍요로움을 주는 것임을 교육자-리더는 알고 있어야 한다.

풀어짐을 나는 Entwicklung이라고 생각한다. 풀어지는 것은,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이미 어떤 방향을 가지고 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풀어지는 것을 단순히 물 속에서의 잉크의 풀어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또는 진공상태에서의 무의미한-향방 없는 풀어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풀어짐은 어떠한 장-세력-관계성 안에서의 풀어짐이며,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되는 성령 안에서,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섭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품에서 풀어진다. 그러므로 풀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은 없다.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는데, 왜 신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었다. 왜 그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셨을까. 왜 우리는 지성으로도, 감정으로도, 의지로도, 그 어떤 협동적 수행으로도 그분을 볼 수 없고, 그분에 의해서만 일으켜지는 ‘믿음’에 의해서만 그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왜 우리의 신체의 기관들-성경에서 ‘몸’이라 말하며, 고대 세계관에서 ‘세상적’이라 말하는 모든 수행기관들-만으로는 그분을 인식할 수가 없으며, 이 모든 감각기관과 오성과 이성들이 그에 의해 일으켜져야만, 다시 말해 죽은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철저히 통과-세례-해야만 그분을 보게 되는 것일까.

이런 논리로 추론을 해가면, 결국 세상의 지혜로운 것이나 세상의 강한 것이나 세상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그분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아름답지 못하고 온전치 못한 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성경에서는 허다하며 역사에서도 그러하다. 약해서 가능하다? 이 말 자체는 성립할 수 없다. 이 말은 약해서 강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신다. 그들은 의지할 곳이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들은 자기에게 내재된 어떤 것으로 삶을 꾸려나갈 능력이 없으며, 이 땅에서 향할 어떤 도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순례자이며, 철저히 ‘어딘가를 향해야 하는’ 절박한 지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태도변경의 자유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건져주는 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손을 내뻗고 간청하는 실존 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하이데거적인 불안 속의 기투와도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어떤 용기 같은 것이 아니며, 양심에 떳떳한 본래적 존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이다. 용기 없는 (사울) 자로서, 떳떳하지 못한 (야곱) 자로서, 유약한 (이삭) 자이며, 나중 된 (다윗) 자로서, 형제를 핍박하던 (바울) 자로서, 주님을 배신한 (베드로) 자로서, 그는 주 앞에 선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 나는 당신의 거룩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벌레와도 같은 자니이다.”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께 나갈만한 것을 갖추고 있지 못함을 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적은 열린다. 벗은 자가 입으며, 눈 먼자가 보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워진다. 그들을 결박하던 ‘소외성’ 그리고 ‘무성’의 권세가 발가벗겨지고, 무장해제되며,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는다. 그들은 agent가 자신이 아니며 성령임을 깨닫는다. 구원의 능력과 권세가 나로부터가 아니며 주로부터 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정직하여진 심령으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편에서 주신 새 마음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입으며 미천한 것이 고귀한 것으로 덧입는 충만함을 사모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존귀함과 영광의 큰 힘이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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