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고쳐서 >계속< 쓰기 16.04.2018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고쳐서 >계속< 쓰기 16.04.2018

jo_nghyuk 2018. 4. 17. 03:46

독일에 와서 변한 삶의 방식 중 하나가 새로운 것을 사는 대신 기존의 것을 수리해서 쓰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좀처럼 새로운 것을 사거나 하지 않고, 직접 수리하거나 공들여 관리하면서 오랫동안 기존의 것을 지니는 것을 선호하는 듯 하다.

덕분에 나도 컴퓨터 하판에서부터 시계 끈, 필통, 헤드폰의 솜에 이르기까지 고쳐서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이게 기분이 참 좋다. 한국에서 핸드폰을 2년 주기로 교체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소비, 소비, 소비로 가득채운 삶이었다. 사실 그러한 삶에는 기존의 것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는 것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만이 넘쳐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삶에 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게 희한하게도 다시 스스로가 연구 중에 있는 시간의식과 관련지어지는데, 과거지향의 층은 매우 얇아지고, 미래지향의 층이 매우 두터워지는데, 이때의 미래지향은 기대라기보다는 염려Sorge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불확실한 미래를 끊임없이 기획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뜻과 다른 미래지평을 만나면 괜스레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와의 연속성이 그래서 매우 빈약하다는 것인데, 이 흐릿한 시간의식은 결국에는 현재를 무한히 소실하는 순간들의 단절로써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래도 불확실하고, 과거는 존중받지 못하며, 현재는 불안한 시간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사람들의 수리공 같은 성벽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에 있어서 강한 이들은 새로운 감각들에 대해서는 무디다는 인상을 나로 하여금 받게 하는데, 단적인 예로 음식에 대한 감각이 한국인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맛의 '어우러짐'이라든가 '감칠맛'이라든가 하는 오묘하고 섬세한 층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커피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지금까지 플랫 화이트를 맛있게 하는 카페를 독일에서 본 일이 없다. 벨기에 정도까지만 나가도 근사한 핸드드립을 즐길 수 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 '재미없는'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글쎄, 말하자면 애초부터 나는 독일 사람들처럼 여가를 보내며 산다. 헤드폰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며, 자전거를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한다. 집에서 요리해 먹거나, 커피를 내려 먹거나, 넷플릭스를 본다거나 하면서 산다. 보통은 주말에 티비를 보거나, 다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한다. 재밌는 것은,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삶의 양태가 어떤 '선형적인' 시간의식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뉴스를 보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도서관에 들어가거나 고전어 수업을 듣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와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거나 책을 보고, 음악을 듣는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나로 하여금 오히려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강화해준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가질 때 시간의식이 각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상 하던 것들을 반복하면서 같지만 같지 않은 경험들을 축적해나갈 때 시간의식은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러한 삶이 바쁘고 놀라운 삶보다 훨씬 더 즐겁고 기쁘다. 

그래서 (별로 맘에 안드는) 이 사용하기 불편한 블로그에 근 일년간 사용하던 워드프레스의 글들을 다시 옮겨 담았다. 새로운 것의 편의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과거와 작별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불편한 것은 때론 감수해도 좋은 듯 하다. 편하게 되고자 불편한 것이 가진 것들을 내어버린다면, 사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역사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시간의 이야기라고도 표현될 수 있는 개개인의 그리고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성과도 같다.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미래지향적이게 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답답한) 이 독일 사람들처럼, 나답게, 사람답게, 고향답게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이 작은 도시 예나에 살면서, 가끔씩 암스테르담이나 베를린 등으로 나들이 나가는 삶이 더 재미있고 즐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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