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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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버리지 않는다

jo_nghyuk 2019. 3. 16. 19:13
자격없음 때문에 버려짐의 경험을 한 아이는 커서도 그러한 문법에 갇혀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문법으로 듣고, 그러한 문법으로 행동한다, 자기도 모르게.
독일에 와서 역설적으로 경험하는 공간감 하나는, 아무리 느려도 괜찮다는 저편에서 들려오는 충만한 말과, 느리지만 정직하게 벽돌 한 장씩은 쌓아올릴 수 있다는 힘의 부여empowerment이다. 벽돌 한 장은 쌓을 수 있다. 이제 나는 예수의 가벼운 멍에로 새롭게, 다시금 돌아온다. 나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으시는 주님, 그리고 그 연약한 자와 한 걸음씩을 '산책'하고자 하는 주님. 산책은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뒤로 갈 때도, 에둘러 갈 때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산책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으며, 참으로 도구화되어지지 않는 여가이며, 안식이다. 
신뢰하지 못하는 아이는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신뢰하는 아이는 손에 쥔 것을 놓는다. 손에 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공간을 부여받고, 스스로의 의지를 인정받은 상태이다. 오히려 '다 내게 주어졌다'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손을 비우고, 때에 맞게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자유함을 누린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을 다른 이에게 선물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왜일까,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다 내게 주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며, 에덴동산의 축복이다.
그래서 참으로 누린다는 것은 손에 쥐는 것을 더이상 의미하지 않고, 선한 청지기로서 잘 가꾸고, 관리하며, 다시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My Utmost for His Highest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깨닫는다. 예배는 무엇을 만들어서 드리는 것도 아니요, 억압도 통제도 아니요, 나에게 모든 것을 누리도록 주셨음을 믿고, 주의 손에 올려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갈망으로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며, 무한하다. 마치 아이를 양육하듯이 우리는 마음을 가꾸어야 한다. 주께서 나를 정성스레 다루시듯 내가 내 마음을 다루고 있는가, 아껴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루지 않은 마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정원 속의 꽃들을 상하게 한다. 
나의 가장 큰 갈망은, 정원 안에 있는 꽃들이 꽃들로서 사는 것이며, 동물들이 동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책임 이전에 공동-피조물로서의 사랑의 관계 문제이다) 그리고 정원 안에 있는 것들이 참 모습을 회복하게 하려면, 에덴 동산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음'이며, '자기 비움'이며, 놀라운 공간감 속의 사랑의 인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손에 쥐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권리를 포기한다. 나는 이 차분한 뜨거움을 더욱 갈망한다. 자신의 욕망대로 정원을 다 망쳐버린 모습이 현재의 지구 생태계이다. 
나도 안다, 나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리고 결코 온전해질 수도 없다. 그러나 산책이라고 하는 '과정' 자체에서 나는 온전해져 간다. 속도와 관계 없이 나는 그분과 함께 온전해져 갈 것이다. 내가 갈망하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이 헌신된 사랑, 최고의 사랑, 그리고 공간을 부여해주기 위해 나를 포기하는 사랑이다. 
최근에 기도회에서 욥기를 읽고 있는데,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 역설적으로 온다. 시험과 환난이 와도 내 손 꼭 붙들어라, 걱정하지 말아라, 내 손만 꼭 붙들어라, 아빠가 말씀하신다. 네, 저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당신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내 참 만족이며, 살아가는 즐거움이 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두려워 말라, 주 너의 하나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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