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봄의 자연스러움 본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봄의 자연스러움

jo_nghyuk 2019. 3. 19. 22:51

오늘은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다가 Mensa am Park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지긋이 혼자 거니는데 해가 구름에서 나올때 나도 모르게 '아아'하며 무심코 소리가 나온다. 나무에서 움이 트고 순이 나는 것을 보았고, 공원 길을 따라서 산책하듯 멘자로 향했다. 파스타를 시키고, 샐러드로 올리브, 파프리카, 토마토, 피넛, 참치등을 담아왔는데 3유로가 조금 넘는 가격이 나왔다. 담백한 기분이 들었달까, 무튼 차분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원 길을 따라 내려와 흐르는 강을 멍하니 바라보고 지근거리에 있는 도서관의 카페테리아에 고양이처럼 숨어들어가 온화한 할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받아 홀짝거리며 창 밖을 보니 햇살 아래서 연인이 포옹을 하고 있다. 

잘 조성된 공원 안을 거닐때면 나는 최초의 행복감을 느꼈던 뉴저지의 버클리 하이츠를 떠올린다. 도시 안에 숲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숲 안에 있는 도시는 축축한 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로 하여금 공간감이라는 것에 대해 전복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 나에게 있어서 공간이라 하는 것은 생각 이전에 감정이었고 향유 이전에 현실이었다. 오죽하면 하이데거가, 인간의 최초 개시는 불안이라고 하는 정황에서 출발한다고 했고, 세계 속에 던져진 채로 살아간다고 했을까.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잿빛 파리처럼, 나의 도시도 늘 정신사나웠고, 그 공간의 장 안에 피투된 나의 심정도 늘 불안했더랬다. 모든 에너지가 장 안에서만 생성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공간에 침투되어 공간의 침략을 받으며 살아간다. 거기에서 최초로 건져올려진 경험이 나에게는 버클리 하이츠의 삶이었다. 주중에는 이모의 세탁소에서 물 2리터를 마셔가며 일을 하고, 주말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리고, 강가를 달리고, 거위 가족이 무단횡단을 하는 것을 보며 저녁에는 사촌 형의 지하 거실에서 라디오헤드를 들으며 시간 자체를 향유하곤 했다. 흑인 아줌마가 카랑카랑한 소리로 '다음 역은 맨해튼, 맨해튼이올시다, 34번가!'라고 직접 마이크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을 들으며 한달에 한번씩은 꼭 뉴욕으로 탈주하곤 했더랬지. 

도서관 홀에 앉아 천장을 보면 파란 궁창이 보이고 큰 배처럼 구름이 밀려가는 것이 보인다, 한참을 고개를 들고 보아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런 나에게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든 이의 머리카락은 책을 읽느라 조용히 가라앉아 있고, 이따금씩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향유, 그야말로 시간의 향기의 결을 따라가는 삶을 나는 바이마르에서 살고 있다. 앉아서 연구를 하는 견고한 훈련과 살랑살랑 춤추듯이 고풍스러운 거리를 밟아대는 기쁨은 상반된 감정이 아니라 상보적인 감정이다. 단단함은 부드러움의 전경을 지니기에 넘어짐에 대한 부담이 없이 최선의 달리기를 하고, 부드러움의 지는 단단함의 형이 있어서 바보처럼, 자유롭게 풀어질 수 있다. 다음 학기에 대한 플랜 A는 인텐시브 히브리어를 듣는 것이었다가, 부담을 덜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라틴어 강독을 듣는 것으로 변경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미국 콜로퀴움에 참석하려던 나의 계획이 지도교수님이 나의 모교의 심포지움에 초대되는 바람에 뼈대까지 흔들리고 있다. 뭐 어떤가, 내진설계가 잘 된 건물일수록 갈대처럼 흔들려주도록 하자. (누가 봐도 바보같다 하겠지만) 나는 다음 학기에 일주일에 한번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프랑스어를 등록할까 생각 중이다. 1차적 이유는 프랑스어가 아름다워서이고, 2차적 이유는 소르본 대학 앞의 헌책방에서 사온 리쾨르와 레비나스의 원서를 읽고 논문에 인용하기 위해서이다. 3년에서 3년 반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을텐데, 느리지만 꾸준히 한다면 C1 수업까지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 계획이다. 그러나 계획의 단계의 판타지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imaginatio라 부르는 '미래의 현재'는 상상의 힘으로서 현재하는 미래이다. 나도 안다, 내 뜻대로 되는게 없다는 것을. 그만 좀 괴롭혀라) 

부드러움과 딱딱함이 씨줄 날줄처럼 얽힌 것이 사람의 인생이 아니던가. 삶에는 부드러움만 있지도, 둔탁함만 있지도 않다. 나는 둔탁한 현실을 부드러운 배로 밀고 나아가는 지렁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의 실존이 단단함이 아니라 유약함인 것을. 왜 나는 이 모양이지를 자책할 것이 아니라 유약함을 직면하고 단단함 가운데로 밀고 나가는 것이 실존이며 현존재이다. 그게 참으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스스로의 생에 대해서 스스로의 리듬을 스스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면, 그 눈물겨운 설레임의 계절이 내 육중하게 닫힌 문을 두드릴 때면, 나는 뉴저지의 숲에서 보낸 주중과 주말의 얽힌 리듬을 떠올린다. 주중은 죽을 것 같았고, 주말은 살 판 났었다. 사람들은 내 블로그에 들어오면 지나치게 진중한 나의 내면을 보고 낯설다고 한다지만, 와이 낫? 부드러운 배를 가진 지렁이일수록 온 몸을 자신이 가진 모든 탄력을 다해 튕겨내야 하는 것 아니던지. 죽을 힘을 다하는 것도 나이고 한량처럼 띵가띵가하는 것도 나이다. 나는 내 공간에서만큼은 내 맨 얼굴로 살 거다. 최근에 다시 노래의 발성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소리를 꾸미려고 하면, 즉 내가 의도하는 것이 있으면 소리가 안난다는 것이다. 발성이 좋아지려면 소리가 자연스러워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소리가 나는 사람인지를 가만히, 두고,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노래를 부르는 나를 바라볼 정도로 꾸밈이 없어야 한다. (물론 나는 노래를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론가는 시인보다 분석을 잘하는 법이다)

나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나를 풀어지게 하는 공간이 있다. 후자를 나는 사랑의 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 공간 안에서 놀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한 공간이 되어주어야 한다. 사람은 자라면서 한 사람의 친구가 되고, 한 사람의 남편이 되고, 결국은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된다. 이 공간의 확장을 보라. 나는 더 큰 사랑을 원한다. 아아, 프랑스어같은 봄이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