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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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Besonnenheit der Liebe

jo_nghyuk 2019. 3. 22. 18:33

이전에는 모임 속에서 늘 무언가 웃겨야 한다는 강박 아닌 충동이 있었나보다. 십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지인이 나에게 '웃긴 이야기를 꼭 하려 할 필요 없다'라고 조언해주었다. 재밌는 것은 더이상 사람들을 웃기는 것을 못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모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모임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지속되었었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 한달이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인이 참 고맙다. 있는 모습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내가 유머와 거룩함의 균형을 깨닫게 되었을까? 나에게는 그 한달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기간은 나에게 필요한 기간이었다. 

그 이후로, 언제 입을 열어야 하고, 언제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생긴듯 하다. 반대로, 어떤 모임에서 어떤 이가 지나치게 웃음을 유발하려 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도 속이 공허하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려 한다. 그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것에 대한 넓은 공간을 먼저 만들어주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가장 단단한 길이기도 하다. 나에게 그 한달이 필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거절감을 견뎌야만 했다. 음, 꼭 거절감을 경험하면서까지 나를 묶어두어야 했었을까? 그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아니,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젊은 친구들과 모임을 할 기회가 많이 생기면서, 내가 말수를 줄이는 순간이 강박적이지가 않고 부드럽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어어,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웠나, 이전에는 모임에 침묵이 찾아오는 것을 메꾸려고만 했는데, 그대로 놔두면, 다른 누군가가 즐겁고 재치있게 공을 드리블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의 나의 포지션은 코치에 가까운 느낌이다. 내가 공을 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을 모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볼을 주기 위함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볼을 가지는 것보다 볼을 배급하고, 전체 그림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모임이 따뜻해지고 쾌활해지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늙은 것일까 성숙해진 것일까 아니 아주 조금 자란 것이겠지) 

모임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을 강박에서 풀어주고, 스스로 적당하게 긴장하는 자율적인 훈육의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참 자유의 장이며, 거룩하게 정화된 불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만난 나의 스승들은 사랑이 있을 때도 있었고, 사랑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나를 지지해주는 깨끗한 버팀목이 있다면, 나는 그 안에서 느리지만 조금씩 생을 전개해가는 self-control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설교에서 들었던 것처럼, 정답으로 다그치는 것이 답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옥죄어버리고, 관계를 파괴한다. 고통 중에 있던 욥에게 필요한 것은 다그침이 아니었다. 욥의 어려움은 고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경직되고 완고해진 관계에 있었다. 최근에 나는 계속 같은 음성을 주로부터 듣는다: '바보가 되어라, 사랑해주어라, 불안에 떠는 흠이 많고 약한 이들을 감싸주고 안아주어라, 좋은 면만 보거라' 나는 이제 그 거룩한 균형을, 그 거룩하게 정화된 불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자로서, 많은 작은 이들을 섬기는 자리로 보냄을 받는다. 나는 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 뿐이다. 사랑, 사랑, 사랑. 그 거룩하고 깨끗한, 상처를 아물게 할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꽃이 필 수박에 없는, 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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