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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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4월 30일 저녁기도회 복기, transitional justice와 퀴리에 엘레이손

jo_nghyuk 2019. 5. 1. 04:43

소위 신앙과 신학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때가 있다. 신학을 하고 나면 무지한 채로 머무를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부조리한 상황들을 만나면 머리 뿐만 아니라 가슴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답은 하나다.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진영에 서있다. 그러나 그 진영들의 굴곡진 것들 사이에 껴서 전체적 조망을 할수밖에 없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차라리 청년의 때에 나는 마음이 편했다. 그냥 한쪽에 서면, 무지한 채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허물과 악을 방관할 수는 없는 위치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허물과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며 소리를 치면서, 동시에 용서와 화해를 추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각 진영이 말하는 정의가 아니다. 각 진영이 말하는 정의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transitional justice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만 한다. 상대의 타자성에 대한 인정Anerkennung은 내 관점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서, 상대로부터, 상대에 관한 것을 배우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무겁다. 마음이 참으로 무겁고, 아프다. 그냥,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고 상대의 아픔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 어쩔 수 없이 관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지만 그 관점 자체를 태도변경할 수 있는 겸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안되는 것이 인류의 원죄인건가, 하는 무거운 생각까지 나는 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어 수업을 들을 때면, 나는 정말 나다워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학습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다보면, '나답게 사는 것'이 때로 얼마나 폐가 되는 일인지를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덕'스러운 사람이 되려면, 갈수록 비워야 하고, 갈수록 겸손해야 하고, 갈수록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 갈수록 겸비해야 하고, 갈수록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어야 한다. 이 감각을 잊을 때 나 또한 그런 폐 끼치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 같아서, 오늘은 더더욱 마음이 무겁다. 살면서 폐를 안 끼칠 수는 없으나, 누군가가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내 존재의 태만 때문이고, 무지를 지속하는 아집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일이다. 

두 가지 마음이 상존한다. 정말이지 교토의 북쪽 산 속으로, 숲 속으로 들어가서 몇 일이고 몇 날이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 피가 철철 흐르는 상한 심장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애통해하며 우는 것을 그치지 않고 싶은 마음.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쟁이이고, 인정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 죄인됨을 미워하며 숨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자체를 애통해 하면서, 계속 그 가운데 서서 중보하게 하소서. 너무 아픕니다. 하지만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나 좋자고 편하자고 수고를 그칠 수가 없습니다. 내 등을 보고, 나를 믿어서 애를 쓰며 달려오는 녀석들이 있어서, 내 의대로, 내 성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통하고, 눈물만 나나 봅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모르고 저러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퀴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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