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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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jo_nghyuk 2009. 2. 26. 14:23

유행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특이현상이 사회 안에서 공통적으로 오버플로우overflow하는 것. 예를 들어 빨간, 노란, 파란, 형광계통의 바지를 유행시기 이전에 입은 개인은-그리고 그것이 일정 집단적인 현상이라 해도 그것이 여전히 마이너minor적인 흐름이라면 그들은 전체집단에 의하여 괴짜weirdoes로 단죄당하게 된다. 유행은 마치 담론과도 같아서, 주류mainstream에 의하여 운동하여야만 그것이 공인되어질 수 있는데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승인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역사적인 근거, 즉 사회적인 요구가 먼저 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행렬을 통해 우리는 현재 한국사회 안에서의 공통적인 요구(또한 이것은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추론 가능한 요구이다)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현상은, 아름답고 소박한 종교인 앞에 스스로 치유받고 정화받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갈급함이며 또한 명동 거리거리를 휘감고 있는 이 추모 행렬은 고통에 또아리치는 현대인의 내면이 체현화incarnation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성당을 (그리고 교회를-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성스런sacred 곳이라면 그 어느 곳place이라도-) 이미 찾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그것이 여간 생경한 작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번거롭기도 하다! 인간은 그 자자 혼자일 때 얼마나 권태로우며 또한 태만하고 나약한 것일까!)

나는 이전에 미니홈피 다이어리 서랍에 넣어두었던 군(무리)와 독(솔로이스트)에 대한 나의 지론을 잠깐 꺼내어보았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군群을 이룬다. 특이할 점은, 동물들이 동일한 종種에 의하여 군을 이루듯이, 우리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kind 사람들을 찾아 무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학을 좋아하는 하나로는 고독하고 약하며 친구는 계속해서 동료들을 자기 주위에 밀가루 반죽덩이처럼 붙여가면서 다른 이들의 힘을 확장시켜주며 동시적으로 자신의 힘을 확장해나간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자신 혼자서는 어지간하게 조용한 친구가 또래의 익살스러운 녀석들과 friendship 이루고 나니 굉장히 활달하고 코믹일색인 녀석으로 변태metamorphosis해버렸다. 친구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원함desire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자신이 설사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선험적인 욕구/욕망/원함desire) 너무도 신실하게 예전부터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놀라운 것이다.) 역시 인간은 우주 앞의 갈대이자 소셜 애니멀social animal(사회적 동물) 것이다.

 

명동의 행렬에 유행(소위 트렌드)라는 어휘를 붙여서 오해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유행을 사조/조류/경향 current/trend/tendency 의 개념으로 말하려는 의도였음을 밝힌다.

이것은 거대한 흐름이다. 시대의 요구에 결합combine되어 부어지는 크나큰 물결인 것이다. 크게는,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주창suggest하였던 「제 3의 물결(정보화 혁명 뿐만이 아닌 삶의 기반과 삶의 전유방식 자체를 전복시키는 전혀 새롭고 전반적인 문명의 혁명)과 촛불시위, 붉은 악마, 혹은 작게는 마이너minor적인 운동, 힙합 패션 혹은 더 작게는 학교나 교회 안에서의 소그룹 동아리 활동, 더 작게는 단 두 명의 우정friendship까지도 전부 경향 내지는 흐름의 분야에 속해 있으며 동일한 법칙에 의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팀블로그 또한, 어떠한 일련의 요구desire와 그에 상응하는 행동action(더 정확히 말하자면 운동movement라고 말해야 옳지 않나 싶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은 크든 작든, 거대한 흐름flow에 의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거시적인 사조에서 떨어져나올 때도 우리는 부지중에 미시적인 흐름에 속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구와 운동의 제창, 그리고 다수의 수용(이때의 다수는 두 명에서부터 65억 명까지 그 범위가 상당히 광대하다. 국가적인 차원의 유행이 있으며, 도시적인, 단체적인, 개인적인 유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에 의해 유행은 생성된다고 볼 수가 있겠다.

 

나는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커다란 흐름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작은 흐름은 어떠한가? , 철저한 개인individual 어떠한가? 크든 작든 간 어떤 분별distinction이 필수적으로 수행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우리는 때로 집단 무의식에 걸린 절대다수를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현상에서 보기도 하였고, 집단 무의식을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소외자/관찰자/방관자outsider 되어버리는 경험을 이미 스스로 해보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분별》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발원origin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이 점만은 분명하다. 분별은 분명히, 진리에서 출원되어져야만 한다.


  



Verse1
커다란 강물을 따르며 움직이는 달과
구름처럼
나또한 언젠간 타협아닌 타협을 하며 걸음을
걷는
한마리 회색 늑대를 꿈꿨지 그대들이
차마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나그네
늑대
눈빛에 머금은 사자의 등뒤에 외치던 비굴한
고함
뒤에 뒷걸음질치며 흔들려 삼켜 내딛지 못한
한발
하늘의 입사귈 흔들던 비명의
소리의
마지막 끝자락에 걸린 떨리던
걸음처럼
허약한 인간 그손에 잡히길
거부했던
낭떠러지 틈사이 작은
나무가지또한
울부짖음속에 뒤섞인 손아귀에
감겨
있던 눈이 나즈막히 열린
순간
대지를 흔들던 울림이 서서히 흔적을 감추며
소멸
기억의 메아리가 머리속과 입천장을 흔들며
전율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흐르던 피아노
선율
가을의 향기를 느끼는 자에겐 저녁의 미풍을
선물
향기만큼이나 깊어진 눈동자에 담아
흘리어
보내던 강물의 물결을 타고 걸음을
걷는
하늘의 이리처럼 유유히 흘러가듯
한걸음을

Verse2
산은 높은 하늘에 입맞추어
주고
파도는 거칠게 내리치는 서로를 포옹을
하며
햇빛은 식어버린 대지를 따스히
보듬어주고
바람은 근심에 가득찬 한숨을 가리는 키스를
하는데
자신조차 홀로 외롭게 서있는 늑대를 사랑할수
없네
그렇게 내미는 손길을 거부하며
외로이
하늘및 산을 타며 흐름을 느끼고 따스한 햇빛을
느끼며
시원한 바람을 느끼어 보려
하지만
모든것이 일순간에 지나가며 뒤로
다가오는
차갑게 시리기만 했던 겨울에 떨리는 다리를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고 견디려 하고 있지 하지만 너무
힘든
얼어버린 눈물 밑으로 굳게 다문
이빨
모든 고통을 이겨내듯 힘차게 지르는
파죽의 howl
그래 늑대 또한 그와 닮은 누구도 한마디 건네지
못할
힘겨운
겨울

Verse3
이기지 못할 적은 없다 처음부터
되뇌이며
세상에 갇힌 외톨박이
늑대같이
귀를 닫고 수많은 맹수를 뒤로
한채
싸움터를 떠나 높은 바위산을
찾아
모든 경관을 수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짓지만 너무도 착각을
했으니
아무리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애써 올라가
봤자
머리위 나비보다 먼곳을 볼수가
없고
다리밑 개미처럼 작은것을 접할수가
없지
이처럼 작은 것에서도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적을 이길수가
있나
원대한 포부를 담은 무거워진 머릴 지탱하기
위한
가늘은 다리는 힘없이 흔들려 떨리기만
하지
하지만 후회마 어짜피 내가 정한
길임에
눈을 감고 나에게 되묻지 Who am I?


분별의 얘기를 하면서, 대학교 재학 시절, 흑인 음악 동아리에서 처음 솔로로 공연을 하며 썼던 가사가 떠오른다. 이때 나는 제목을 「늑」으로 지었었다. 당시 내 필명(그리고 a.k.a라고 유행처럼 이름 뒤에 붙이던 랩명)은 랑(/)이었다. 첫 번째 랑은 물결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플로우(힙합 용어로 억양이나 힘조절 악센트등을 통해 랩을 자연스럽게 또는 멋드러지게 하는 요소를 뜻함) 그리고 나는 곧 그 의미 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때부터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S/Z」이론의 기질이 내 텍스트 안에서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나 보다. (세라진느와 잠비넬라의 이니셜을 각각 딴 소설로, 발자크의 소설「세라진느-많은 이들이 사라진」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나 역시 세라진느와 사라진의 엉뚱한 한국적 기표 때문에 ‘disappeared’로 작품 제목이 머리 속에서 미끄러진 적이 있다. 이 언어의 불확정성- 아무튼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당시 S/Z」이론을 알지도 못하면서 랑의 표기를 고의적으로 으로 혼동시키는 유희에 몰입하고 있는 시대 요구의 공통성을 보였던 것 같다.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나 우리나 사실은 같은(비슷한) 시대에, 같은 요구를 가지며 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비단 나 뿐일까. 중요한 것은, 바르트는 그것을 이론화하고 도식화시키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기에 전혀 새로운 비평이론을 창조한 것 뿐이지, 그 요구는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사실 바르트의 책을 읽으면서 상당부분 그와 나의 유사점을 찾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일본의 뛰어난 감각력에 대한 그의 통찰과 찬사 뿐만 아니라, 항상 시작점전통적인 1’에 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예를 들면, 나는 중학교 재학 시절 당시 유명한 만화 드래곤 볼」을 각색하는 재미에 몰두해 있었다. 당시 같은 교회에 다니던 길씨 성을 가진 병근이라는 친구는 나보다도 놀라운 각색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각색 능력으로 손오공이나 베지터를 변형시킨 비슷한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외양의 초사이어인들을 창조해내었다. 이를테면 머리 모양을 더 길게 혹은 다른 방향으로 왁스를 발라준다든지, 초사이어인의 아름다움의 상징인 그들의 아우라 불꽃 색을 전혀 다른 색(특히 보라색과 초록색 등으로 변형시켰을 때 그 아름다움은 이제부터는 감각적인 놀라움으로 그 즐거움의 영역을 달리하게 된다.)의 하이-테크high-tech 펜이나 지브라zebra 형광펜으로 색감을 뽐내준다든지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드래곤 볼」의 원작도 즐겼지만, 드래곤 볼」이 잡지 속에 20여 페이지 분량으로 일주일 만에 연재되는 터라 그 사이 6일의 행간을 우리들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메꾸어가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상력이 놀랍게 발현될 때에는, 소위 말해서 원작보다 더 놀랍고 재미있는작품을 우리가 창출해낸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작품이 보여주는 미적 감각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원작을 볼 때마다 훨씬 즐거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 , 당시 나는 1편에서 작품을 시작하지 않고, 27편 언저리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것을 즐겨했다. 이 작품은 나의 독자들은 물론 나의 같은 반 친한 코흘리개 녀석들을 포함해, 다른 반에 포진해 있는 만화쟁이들에게 발행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찬사와 불평 아닌 불평을 즐겼다. 찬사는 내 작품의 센스에 대한 것이었으며, 불평은 그 작품이 27편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그 전 이야기를 알 수 없는 까닭인 것이다. 내가 27편부터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일단은 1편부터 차근차근 플롯의 규격과 골격을 계산하여 짜깁기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왜 중간부터 시작하면 안되는 것인가?’ 실제로, 그 작품의 번호는 27편이었다. 기존의 만화는 앞의 스토리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작품 번호 설정은 1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종교적일 정도로 절대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단아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게 내 기질이었다. 나는 반항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게 내가 진정 하고 싶고 시작해보고 싶은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부러 1편부터 26편까지의 스토리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26편의 만화는 유실되었으며 동시에 독자에 의해 재각색이 가능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오만하였으며 어느 순간부터 고독해지기 시작했다. 내 작품을 (그림체나 보여지는 내용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재각색하는 친구는 당시 길씨 성을 가진 그 친구 단 하나 뿐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남들보다 너무 앞서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 어린 시절을 향유하며 살았다. 이 오만성. 하지만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각이 우리의 감각을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심한 상처와 실망감 그리고 상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좀 더 자신의 소리에 공명echo해줄 수 있는 메이트mate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한 메이트를 찾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다. 나 역시 28년동안 피흘리며 나의 메이트를 찾아왔으며 이러한 원리를 알아내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정신 수준의 메이트mate는 비슷하게 오만하다.

     그러한 메이트mate는 역시 비슷하게 고독하다.

     그래서 그러한 메이트mate는 고양이에 가깝다.

 

공감할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마음 속에 꿈꾸고, 그리는 이상적인 메이트mate는 고양이에 가까우며, 우리는 고양이의 방식 이상으로는 메이트mate와 교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교제론인가. 우리의 재능만큼 뛰어난 이는 그도 동일하게 오만하고 고독하며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젊은 시절 상당 세월을 (지금의 나름대로 건강한 교제를 이루기 전까지는)

고독하게 보내왔다.

 

우리의 메이트mate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상대방에게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비극적이지만, 나는 나의 완벽한’ ‘이상향의메이트mate를 수년동안 꿈 속에서만 회담해왔다. 그는 어린 왕자의 머릿빛을 가지고 있었으며 병근이의 총명함과 지금 친구들의 장점들 -선함, 따뜻함, 냉철함, 뛰어난 재능, 사랑, 관용, 외계적, 우주적, 범지구인적 이 모든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우주선 비슷한 속에 있었으며 (이것은 지구보다 위에있었음을 말한다.) 우주선에는 우리 둘만이 있었다. 내 꿈은, 내 무의식은 한 마디로, 오만하고 소외된 자의 고독감과 작더라도 일련의 흐름(friendship부터 trend까지)의 소유에 대한 엄청난 열망desire을 함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한 나의 심정은 그러하다. 내 주변, 내 관계relationship의 모든 네트워크network(관계그물)에 놓은 사람들 중 어떠한 사람도 나의 입맛취향에 그 오만한 고상함에 맞지 못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의 메이트mate를 계속해서 찾지 못하는 이유이다. 온전한 메이트mate는 없다. 있다면 예수님Jesus 한 분일 것이다. 성육신incarnation되어진 우리의 온전한 메이트mate는 그 분Jesus 한 분 뿐일 것이다. 지금 자신이 진정한 메이트mate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 친구의 가치를 모욕하는 짓은 그만둬 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에게는 미안하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나의 주장은 결연하다. 세상에 아무리 선한 친구가 있다 해도, 아무리 끈기 가득한 친구가 있다 해도, 혹은 인내와 사랑으로 가득한 목회자나 자신의 멘토가 있다 해도, 그는 끝까지 나를 참아주거나 나를 위로하거나 나를 품어줄 순 없다. “끝까지나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성을 넘어서는 인격인 까닭이다.

지금 누군가 나를 초월적인/한없는사랑으로 나를 품어주고 있다면, 한번 그를 점검해보아라.

그는 지금 자신의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식의 끝자락을 잡고 싶었고, 내 욕망의 끝자락을 잡고 뒤집어버리고 싶었으며, 관계의 끝까지 뻗쳐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보자기처럼 뒤집어 모든 것을 감싸 안아버리고 싶은 끝없는욕망passion과 원함desire를 가지고 있는 작고 오만하고(때로는 정반대의 기질을 보이며 비굴하기 짝이 없으며) 고독한 한 사람이다.

그러나 항상 보는 것은, 지식의 끝에도 그 분이 계시며, 우주의 끝자락에도 그 분이 계시며, 관계의 끝자락에서도 그 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 욕망의 끝자락을 넘어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며 숭고한 것으로 채워지고 싶은 본연의 욕망은 결국 그 분으로, 그리고 그 임재로 나를 가득 채우고 싶은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영원히 고독하며 나의 메이트mate(단짝)은 여전히 주님이다.

미안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하는 동생도, 사랑하는 내 애인도, 12년이 넘게 사귄 나의 베스트 프렌드도, 교회 속의 둘 도 없는 사인방도, 사랑하는 제자들도, 목회자도, 멘토도, 간사님도, 그 누구도 나와 24시간 동행하며 나의 진정한 욕망desire를 채워줄 수 없다.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내 진정한 욕망desire는 진정 고독해지는 그 순간에 완벽하게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실로 그것은 위대한 순간에 대한 열정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위대한 순간은 우주universe 속의 개인individual일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며,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완벽하게 고독하며 완벽하게 외롭지 않으며 완벽하게 사랑을 창조주로부터 받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 완벽하게 고독한 순간이 우주의 창조자LORD와 나 단 둘 뿐의 시간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고독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메이트mate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오만하지도 않고(가끔은 그의 영광에 걸맞게 오만하시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며(가끔은 그의 옳으심에 걸맞게 고집스러우시며), 고독하지도 않다.(물론 그는 옆에 누가 없어도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 엄청나게 굶주려 있다! 우리의 칭찬과 관심에 엄청나게 목말라 있다! 이 얼마나 완벽한 메이트mate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욕망은 단 한 분의 메이트mate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진정 고독한 그 순간에만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과 단 둘만이 보내는 은밀한 여가 내지는 신혼여행이라고 나는 칭하고 싶다.) 우리는 진정 고독을 원하면서도, 진정 자유를 원하면서도, 함께 함과 연대감 그리고 구속감을 동시에 느끼고 싶어한다. , 이제는 아쉬울 것이 없다. 나는 완벽한 메이트mate를 얻었다. 완벽한 메이트mate, 친구가 하는 일을 그도 잘 알고 동의하며 따라하는 것이다. 그 분이 어떻게 하셨는가 보자. 그는 더 많은 친구를 찾아 성육신incarnation하셨다.

우리는 내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공동체성육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지체 옆에 가 그와 동일한 모양으로 성육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떠한 흐름(우정friendship에서 대세trend까지 전부)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란 당신이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 안에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이며 낮아짐이다. 이것이 명동 거리 거리를 휩쓸고 있는 외로운 이들의 고통스러운 또아리가 소박하고 아름답게 돌아가신 노인 앞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문장이 길어져서 거의 김종선 형제의 논문 몇 편을 합친 분량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술하였으며 내게 가르치시는 것을 기술하였을 뿐이고 동시에 내가 쓰고 싶은 것들을 전부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흐름trend에 대해 글을 쓰면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글을 쓰기도 하였고 명동 성당의 구렁이 행렬의 또아리처럼 은근하고 교묘하게 여러 주제와 포커스를 터치하며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나는 절대로 누구를 비판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며 이 글에서 어느 누구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동시에 나는 나의 가족과 친구와 여자친구와 김종선씨와 팀블 일원들과 주님과 선생님과 목사님과 나의 모든 간사님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전심으로 온 맘다해 사랑하고 있음을 밝힌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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