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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즈의 초상화

jo_nghyuk 2022. 9. 6. 18:34

나는 같은 스니커즈를 산다. 십여년 전 스헤브닝언에서 찍은 사진 속에도 동일한 스니커즈가 피사체로 담겨져 있다. 매번 같은 운동화를 산다고 해도 그것이 새 운동화라는 점에서 나는 매번 다른 운동화를 사는 것이다. 나는 오늘을 살지만 같은 오늘을 살지 않고 새로운 현재라는 점에서 매번 다른 오늘을 살고, 그 다른 오늘들이 나의 인생을 구성할 것이다.  새로움과 반복이 서로 얽혀서 삶의 리듬을 구성한다. 다름 가운데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동일하다는 신실함이다. 

아무리 힘겨워도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것만은 멈추지 말라고, 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하셨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 그냥 흐르는 시간은 내 뒤로 지나가 산란되어질 뿐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페달을 돌리는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 운동화를 책상 위에 놓고 운동화의 옆 모습을 지긋이 본다. 지나간 시간들이 비스듬한 직선의 흔적으로 운동화 표면 위에 새겨져 있다. 저 새겨짐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내가 스쳐지나갔던 어떤 것들이 나에게 남기고 간 역사성에 가깝다. 스탠스미스 운동화의 뒤꿈치 부분은 초록 로고가 박혀 있다. 나는 문득 내 운동화를 스케치하고 싶었다. 지나간 빗금같은 시간의 화살들처럼 연필의 선들이 지금 이 운동화를 기억하는 무언가를 종이 위에 새겨넣고 있다. 뒤꿈치 부분에 초록 로고는 발뒤꿈치를 놋뱀에게 물린 흔적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놋뱀은 나의 죄를 기억하기 위한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야 함을 지시한다. 나의 삶의 우상들은 오물이나 찌꺼기의 재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금을 녹여 주조한 것들이다. 그리고 장신구로서 나에게 가장 비근하게 존재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내 마음이 가는 것을 나는 금으로 주조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sacre coeur 교회의 심장이 금이듯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을 지향하고 그것을 가장 귀한 금으로 장식한다. 그 누구도 우상을 남는 찌꺼기로 주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상은 우리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거주지를 두고 있다. 나의 심장이 다시 금이 되기 위해서는, 금으로 만든 우상들을 가장 먼저 녹여내어야 한다. 

때로 그것은 너무도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땅을 깨며 나아가듯, 쇄빙선이 얼음땅을 부수고, 용암이 땅을 다시 형상화하듯이 주어진 세계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생활세계를 바꾸어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역량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점에서 나의 존재의 주체성은 곧 책임성을 담지하고 있다. 솔로몬은 우상 한 가운데에서 살았고 하나님은 늘 꿈에 나타나 경고하셨다. 일천 번제는 일천 우상으로 탈바꿈하였고 솔로몬은 받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다.

발뒤꿈치를 뱀에게 물린 것처럼 휘청일 때마다, 나는 내 위주로 둘러싸인 세계Umwelt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시기로 작정된 새로운 세계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눈길을 돌리는 것은 관조적 시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은 행위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담대해야 하고 담대함은 행동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 용기를 내는 자율성Autonomie은 용기를 받아주시는 분을 향한 의존성Abhängigkeit과 늘 결합되어 사고되어져야 한다. 불확정성의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존성만이 아니라 바다 위에 땅을 만들어내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gutes Leben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내 운동화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내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다시 성찰하는 현재를 흐르는 역사 속에 새겨넣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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