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월 9일의 수기, 앞으로 17페이지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1월 9일의 수기, 앞으로 17페이지

jo_nghyuk 2023. 1. 9. 20:00

드레스덴에 다녀오면서 매우 우연히 베르메르의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ein brieflesendes Mädchen am offenen Fenster>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을 이전에 보았을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느껴졌다. 알고 보니 소녀 뒤에 있던 큐피트의 그림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큐피트의 그림이 복원되고 나니 그림의 해석이 달라졌다. 이전에 이 그림을 보았을 때에는 매우 어두운 분위기에서 어떤 여인이 알 수 없는 편지를 읽는 주제라고 파악했었는데, 큐피트의 부활로 말미암아 소녀가 읽는 편지는 사랑의 편지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큐피트의 액자의 부활로 그림의 전체 구도 또한 안정화를 이루었다. 베르메르는 그림 속에 주제를 암시하는 장치들을 배치해서 구도와 서사 모두를 추구하는 화가이다. 역사적 복원 작업이 의미의 재형상화를 이루었다.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며, 내 앞에 놓여진 것의 변경에 의해 충분히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의미는 형상화되고, 재형상화된다. 객관적 역사 사료에 기초한 과거의 복원작업은 해석의 복원이며 미래지향적인 재해석을 낳는다. 베르메르의 이전 도록을 보면, 덧칠한 벽 뒤에 큐피트가 있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덧칠을 베르메르의 의도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림의 구도와 주제는 불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독일 사람들 답게 수차례에 걸친 토론 끝에 이들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복원 작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Alte Meister의 큐레이터가 말하기를 이 복원된 그림은 1월 9일에 암스테르담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델프트를 떠난 뒤로 드레스덴에 정주하고 있었을 그림이 베르메르의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나도 올해가 되면 서울로 혹은 대한민국의 다른 도시로 떠날 것이다, 아마도. 남은 기간동안 나는 나의 논문을 복원시키고 싶다. 작은 큐피트의 그림 액자 하나로 그림 속 어두웠던 방이 환해지고 소녀의 편지는 연애편지로 재형상화되었다. 어두웠던 방에 스위치를 켜기 위해서는 부산하게 스위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했던 것을 톺아보고 복기하는 과정을 반복 또 반복하면서 그 되짚음의 손짓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했던 것을 다시 새롭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꿈 속에서의 선배는 논문 막바지의 나에게 주는 조언으로 앞으로 17페이지. 라고 말했다. 힘을 빼고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말라는 어느 재즈 연주자의 조언이 떠올랐다. 앞으로 71페이지가 남았더라도 나는 힘을 빼고, 천천히 페달을 굴릴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땅의 오돌토돌한 감각을 느끼며 산보하듯 달릴 것이다.
서점에서 스케쥴러를 샀다. Tageskalender 버전인데, 하루 하루가 한 페이지 씩을 차지하고 적을 공간이 많아서 두께도 이전것보다 훨씬 두텁다. 남은 시간을 밀도 있게 쓰고 싶다는 마음에 이 스케쥴러로 골랐다. 지난 주에 한 일들을 적어넣고, 이번 주에 할 일, 다음 주에 해야 할 일들을 기입한다. 내가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는 어제 무엇을 했으며,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사이에서의 지표로서 오늘이 구성되어야 한다. 넓게는 몇 년 전까지 무엇을 해오고 있으며, 몇 년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사이에서의 지표로서 올 해가 구성되어야 한다. 더 넓게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해오셨으며, 종말까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 지의 사이의 지표로서 나의 인생이 구성되어야 한다. 잊어버린 중요한 요소를 회복하면, 그 시간이 재구성되고 방에 불이 켜진다. 시간을 보낸다passer라는 말은 지나가는 시간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잘 쓰고 보낼 줄 아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미래화이며 동시에 과거화를 이루는 살아있는 현재lebendige Gegenwart의 능력이다. 내가 미미하게 느껴지고 삶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면,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산을 보자.
나의 아버지는 늘 포기하지 말고 다만 페달을 돌리라고 말씀하셨다. 야코프 반 루이스달이 그린 Haarlem 풍경을 보며, 그 속에서 지난하게 페달을 굴리며 네덜란드의 하늘과 바람과 광막한 대지를 몸소 체험했던 2009년의 여름과 가을 사이 어느 때를 떠올렸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잔세스칸스를 거쳐, 할렘까지 가는 내내 몸을 낮게niedrig 낮추고 Niederlande의 평평한 땅에서 부는 큰 바람을 최대한 덜 맞으며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은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는 길 정도에 위치해 있는지 모른다. 리쾨르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 1권을 마치며 비로소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바람을 맞든, 등지고 있든 돌아갈 목표점이 시야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실점이 회복된 저 델프트 화가의 그림처럼 형태가 잡히기 시작한다.
의외로 지금까지 큰 바람 앞에서 버티면서 여기까지 잘 왔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