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월 17-18일의 수기, 흔적과 희망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1월 17-18일의 수기, 흔적과 희망

jo_nghyuk 2023. 1. 18. 01:53

논문을 쓰다가 페이지 수가 너무 안나와서 고민을 지인에게 나누니 박사논문 구격에서의 줄 간격이 1.5라는 말을 들었다. 줄 간격을 변경했더니 놀랍게도 페이지 수가 1.5배 늘어버려서 강제로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러 버렸다. 며칠 전 꿈에서 선배가 나에게 앞으로 17페이지. 라고 말했을 때 남은 페이지 수가 71페이지나 되었었는데, 줄 간격을 바꾸고 나니 정말로 200페이지에서 17페이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나의 석사 논문 주제는 시간성이었다. 이 주제 설정의 이유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이었다. 사람은 왜 있다가 사라지는가. 그리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사 논문 주제 역시 시간성이지만 나는 더 깊은 곳에 들어와 있고 논문을 시작하던 2017년, 아니 2018년보다 훨씬 멀리 와 있다. 사람은 있다가 사라지지만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 이전에 아버지께서 <나의 흔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카페를 개설해두셨었다. 리쾨르의 흔적 개념을 연구하다가 문득 떠오른 <나의 흔적> 카페에 들어가 아버지의 수기들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까지 글들이 작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듯 하다. 큰 아들의 손자를 보지 못하고, 작은 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셨다. 내가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간 날 아버지는 여전히 병원 복도에 비치된 컴퓨터로 느리게 독수리 타이핑을 하셨다. 콩나물 국밥을 먹이고 큰 아들을 보내는 데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내용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눈물이 핑 도는 걸 보면, 리쾨르의 말처럼 흔적이란 여전히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집에 돌아왔는데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하는 아는 동생에게서 한 목사님의 아버지가 소천하셔서 설교하러 올 사람을 수소문 중이라고 들었다. 일단은 대충 둘러대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기도하다가 마음이 걸려서 다시 전화를 걸어 내가 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갑자기 떠나보낸 사람의 황망함을 알기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 멀고 먼 튀빙엔에 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중간에서 나에게 부탁한 그 동생도 아버지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녀 오면서 만나 따뜻한 국밥이라도 사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저녁 기도를 하는데 주께서 기뻐하시는 듯한 마음을 주신다. 

파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와 아내는 벨기에 여행 중 충동적으로 플릭스 버스를 타고 짧은 파리 소풍을 다녀왔었다. 두번째 방문했을 때 나는 리쾨르의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읽었다. 소르본 대학가 서점에서 읽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본으로 레비나스와 리쾨르의 책을 구매했다. 이때 리쾨르를 생각하며 소르본 지구를 참 많이 걸었던 것 같다. 세 번째 방문은 어머니와 함께였다. 네 번째 파리를 방문할 때에는 리쾨르 워크샵을 위해 방문했었다. 리쾨르의 서가를 방문하고, 수도원에서 잠을 자고, 파리 신학부 건물을 매일 같이 드나들었다. 그 이후로 프랑스어를 다시 배우고 있다. 이제는 한글로도 못 읽던 리쾨르의 글을 프랑스어로 읽는다. 며칠 전 리쾨르 학회에서 메일이 오기를, 이번 여름 파리 워크샵의 주제가 <타자로서 자기 자신>라는 내용이었다. 우연들이 개연성을 가지고 내 삶의 어떤 리듬 있는 의미를 중첩적으로 소묘해나가고 있다. 인생에서 이런 흔적들이 겹치고 또 겹치면 우연은 점점 필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기 삶의 서사를 이루어간다. 

나는 타자들이 나에게 남긴 흔적들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지향성 연구도 성령이 보여주신 흔적을 따라가는 영적 순례길이 동기가 되었다. 지난 5년 여간의 사진들이 남긴 시간의 흔적들을 보니 감사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흔적들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어떤 지점까지는 아버지가, 어떤 지점까지는 어머니가, 그리고 나의 스승과 친구들이 더 멀리, 새로 만나 관계를 형성한 또 다른 이들이 나를 더 멀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 감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유학 막바지가 되어도 조금이나마 내 옆의 사람들에게 기여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해석학 스터디를 열거나, 헤겔을 함께 읽거나 하는 것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소의 연대이다. 내가 떠나면 나의 흔적도 이곳에 남겠지. 때로는 그저 옆에 계속 있어주기만 해도 큰 힘이 된다. 날이 갈수록 외로워보이는 목사님 옆을 지키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모세 옆의 여호수아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바울 옆의 디모데처럼. 그렇다기보다 자꾸 목사님과 나의 아버지가 겹쳐 보이는 이유가 제일 크다. 모든 외로운 사람들에게서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느낀다.

나의 정체성은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온 것이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조차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여기까지 오셨다. 그래서 가난한 내가 다시 2023년 여름의 파리 아틀리에를 위해 기도한다. 어제 읽은 프랑스어 성경 앱에서는 요한복음 5:14가 해설되어 있었다.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갈망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Il nous ecoute.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신학자는 늘 튀빙엔에 있다. 5년 전에 그 희망의 신학자가 나에게 먼저 건넨 악수의 손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악수의 손을 내밀어주기 위해 조금 더 뻗어 나가보려고 한다. 오늘 프랑스어 수업에서는 nouveux horizons를 배웠다. 새로운 지평이란 나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갈 때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경계와 한계를 넘어갈 때 비로소 새로운 어떤 것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금요일마다 있는 틸리히 수업에서 나는 용기의 개념에 대해 배웠다. 용기는 단순한 의지력만이 아니라, 마음에 속한 어떤 따뜻하고 활기찬 것이기도 하다. 용기는 그 안에 기쁨과 희망을 담고 있다. 나에게 손을 건넨 누군가로 인해 나도 나의 존재를 내뻗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흔적들에서 미래로 향하는 희망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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