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청년부 수련회 설교 3, 에베소서 6:10-20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청년부 수련회 설교 3, 에베소서 6:10-20

jo_nghyuk 2023. 4. 30. 01:45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10-20
 
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장소는 십자가라는 말씀을 어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를 힘겹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고 우리를 살리는 말씀, 살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제물은 제단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산 제물로 주께 우리 몸을 드린다는 것은 이제 우리 몸이 십자가를 떠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 정욕과 탐심의 노예가 되었고, 불순종하였던 그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 영적 권세를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절은 <전신갑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전신갑주를 오해하면, 이 갑옷을 언제는 무장하고, 언제는 벗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성경의 말씀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사람을 입으라. 
군인은 늘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완전히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전도사들끼리 양복은 우리의 작업복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항상 양복을 입으니까 잘 때 빼고 거의 입고 있으니까 이제는 이 양복이 집에서 입는 옷처럼 익숙해졌다는 말을 그렇게 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하여지라는 말씀은 명령 이전에 복음의 능력의 선포입니다.
에베소서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우시며, 그가 하시는 일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은지에 대해 계속해서 찬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성도들이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성도들의 눈이 열려서 만물을 예수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교회를 그 예수의 머리로 삼으시고, 교회가 그 예수의 충만함이 되게 하셨음을 성도들이 눈이 열려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은, 무엇을 네가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너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크신 능력으로 준비하셨으니, 그가 준비한 것을 공급받으라, 주님이 예비하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2
우리는 주의 충만하심을 공급받고 살아야 합니다. 주가 주시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말하듯이, 마귀의 간계가 세상에서 우리를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위협합니다. 고난으로, 어려움으로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염려거리를 계속해서 줍니다.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주님의 충만하신 공급자이심을 믿는 것에서 나옵니다.
마귀는 위협해서 안되는 성도들은 달콤한 유혹으로 꾀려 합니다. 이 사람이 무엇이 약한가, 마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보다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집중 공략합니다. 기질의 약점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집중 공략하고, 죄의 유혹에 약한 사람을 집중 공략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 무엇이든 내가 가진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우리는 우리 약함을 알기 때문에 유혹 앞에서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도 나의 그 약함을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 약함을 잘 알고 계시고, 그 약함을 강해지는 훈련의 계기로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전신갑주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그치기 보다는, 네가 이것이 약하니 내가 도와주겠다. 같이 한번 이겨보자.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공급하겠다. 하시며 부드럽고 능력있게 말씀하십니다. 
전신갑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내게 입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오래 하셨고, 전도사로 오래동안 머물러 계셨고, 장애인과 노숙자 사역을 자비량으로 하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전도사가 될 마음이 아예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교회에서 너무 열심히 일해서 집에 안들어오셨습니다. 청년들은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교회 목사님도 장로님들도 집사님들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너무 열심히 일하셔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셨고, 어머니가 매우 힘들어하시는 것을 제가 보면서 자랐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전도사란, 목회자란 가족은 힘들고 교회는 행복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힘들게 할 자신이 없어서, 전도사가 되면 결혼을 안하고, 결혼을 하면 전도사가 안되려 했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께서 네덜란드의 선교단체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가족에 대한 사역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교단체의 간사들은 소중한 사람의 결혼식이 있으면 사역을 하다가도 중간에 결혼식을 종종 다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은 간사 중 한 사람이 3시에 조기퇴근을 하길래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내 딸의 생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놀라면서도 감동하고 샘도 났습니다.
제자훈련을 받는 기간에는 힐링 기간이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받는 기간입니다. 저는 이 기간에 제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영국에서 강사님께서 그 기간에 직접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자신이 아들을 입양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들을 입양했는데 그 작은 아들이 자기를 올려다보며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아들아 왜 그러니?
저기, 저를 혹시 안아주실 수 있나요? 아저씨 위에 올라가서 무등을 탈 수 있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사랑하는 아들아.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너무 사모가 되고 한편으로는 너무 샘이 났습니다. 나도 저런 사랑을 받고 싶다. 나도 저런 사랑을 주고 싶다.
치유기간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정말 많이 웁니다. 저도 참 많이 울었고, 사실 제일 시끄럽고 길게 울었습니다. 상처가 너무 아파서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직면하니 너무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때 그 간사님이 저를 안아주셨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안겨있는 상태에서도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남이야. 이 사람은 결국 나를 안고 있는 팔을 푸르고 떠날거야’
그런데 한참동안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참후에 다른 간사님이 저를 가만히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도 남이야. 이 사람은 결국 지쳐서 떠날거야.’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가, 충분한 시간을 아버지와 누리지 못한 그 아픔이 말하는 겁니다.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시간이 지나도, 두시간이 지나도 그 간사님이 저를 계속 조용히 안고 있는 겁니다. 제 눈물은 다시 그쳤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평온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 속에는 지금 사모님이 되신 제 아내와 제 아들이 해변에서 해를 받으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결혼도 안했고 아이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주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나를 위해 네 삶을 바친다면, 너의 삶과 너의 가정은 내가 돌보아줄 것이다’
그 이후 저는 주님의 공급하심을 참 많이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는데, 저희 교회는 1월 1일에 독일의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회를 매년 가졌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년 이 맘 때에 네게 아들이 있으리니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저의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1월 2일에 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습니다. 
 

3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주님은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하십니다. 제가 사실 예나에서 살면서 공부하다가 바이마르로 이사를 간 이유는 그곳에 기도회가 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사를 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서 기도하고, 사랑해라. 사람들을 사랑해라. 아끼지 말고 나누어 주어라. 내가 다 공급하겠다. 하나님은 정말 시간도, 물질도 공급해주셨습니다. 
전신갑주는 나를 감싸는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우리를 안아주시고, 주의 빛으로 둘러서 지켜주십니다. 전신갑주는 나를 감싸는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의 전신갑주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것이 나의 온 “몸”을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 몸의 모든 지체들을 아주 섬세하고 단단하게 이 갑주가 감싸고 지켜줍니다. 
 
1. 진리의 허리 띠는 우리가 진리 위해 온전히 서게 합니다. 군사가 허리 띠를 잘 매면 민첩하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리의 띠가 얼마나 단단히 매여 있는가에 따라 나의 힘이 생기기도 하고, 그것이 단단히 매여 있지 않을 때에는 나의 수치스러움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진리의 띠는 우리를 주님 안에서 의롭게 서게 합니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흉배를 주십니다. 
이 의는 예수께서 주신 의의고, 실제로 나도 주님을 따라가면서 의를 따를 수 있고 의로워지게 하는 놀라운 방어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의 가운데 머물 때에, 이 의의 흉배를 찰 때에 원수는 우리의 심장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향해 달리지 않고, 의를 향해 즐겁게 달릴 수 있습니다.
3. 그렇게 달려가기 위해 주님은 평안으로 내 신을 신게 하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평안함이 나를 뒤따릅니다. 나는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4. 원수는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불화살을 쏘아서 믿음을 격추하려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방패처럼 굳세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구원하신 그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보호자가 되십니다.
5. 마지막으로 우리는 방어구 뿐 아니라 공격의 무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인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묘사합니다. 말씀이 성령의 검이라는 것은, 성령의 뜻대로 말씀을 읽고 준행할 때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도 그래서 19절에서 나를 위해 중보기도해달라고 하면서 “말씀을 나에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은 내가 만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기도와 말씀은 성령 안에서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5
바울은 늘 깨어 있으라. 군사답게 깨어 있고, 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너의 전신갑주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전신갑주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그 새 사람을 믿음으로 입으면 됩니다. 주의 계획으로 들어가면, 주께서 나의 갑옷이 되십니다. 
이 수련회 마지막을 장식하며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나의 갑옷이 되어 주십시오. 나를 꽉 안아주십시오. 주님의 임재가 늘 나를 둘러싸시고, 겨울 나무를 따스한 햇살이 안듯이 나를 안아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빛 아래, 주님의 생명수를 받아서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가 되기를 원합니다. 새 사람을 입겠습니다.
예수님을 입겠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십시오. 주와 늘 동행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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